[더타임스 강민경기자] ‘우리가 알고 있는 광해는 죽었다. 우리가 아는 광해는 누구인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과연 진실인가에 대한 물음은 항상 존재한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진실과는 다른 진실을 마주칠 때가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광해’가 호평 속 주목 받고 있는 이유다. 바로 그 ‘광해군’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영화 속 비추고자 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역사 속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에게 태어난 둘째 왕자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대신해 전쟁의 참혹한 진상을 본 후 태자로 책봉된다. 이후 갑작스런 선조의 죽음으로 조선의 15대 왕으로 1608년~1623년까지 15년간 재위하였다.
- ‘사대부의 예보다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소중하오’ - 영화 ‘광해’의 명대사 中
영화 ‘광해’는 현 시대의 보는 이에게 여러 가지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첫째, ‘광해’ 왕권에 대한 위협 끊임없이 받은 이유는?
영화 ‘광해’는 불안한 시국을 암시하며, 불안에 떠는 왕을 비춘다. 시선은 매우 차갑고 냉철하지만, 그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내면의 아픔은 ‘왕’이라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하고 초조할 뿐이다.
당시 일반에서는 이씨왕조의 기운이 다해 '정씨 왕조'가 들어 설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는 민심을 동요시키는 요인으로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악몽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천도계획을 세웠지만 다른 현안에 밀려 시행되지는 못했다.
초당파적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 전란 중에 불타버린 궁궐을 창건, 개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다시 살리려 하였으며,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하였다. 하지만, 왕권의 안정화 과정에서 피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광해군 역시 서자이었고, 세자 책봉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명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유영경의 모략 때문에 선조의 선위교서를 받지도 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받은 처지였다.
더욱이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하였기에 왕권에 대한 위협을 한층 심화된 상태이었다. 대북파는 잠재적 위험세력인 영창대군파를 모두 제거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칠서(七庶)의 난’을 이용하기로 모의 한다. 대북파의 의도대로 김제남과 그의 아들들을 사사되었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했다가 9살에 죽음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너무 확대되었고, 이는 결국 후일 인조반정의 불씨가 되었다.
둘째, 불안의 시대 속 ‘광해’ 그가 원했던 것은?
정권을 둘러싼 갈등과는 달리 광해군은 전란의 복구 작업에 과감한 조치를 취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세금제도의 모순이 심해지자 재정 확보 및 신정의 면모 쇄신을 위하여 먼저 기존의 공납제의 폐단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1607년 호조참판 한백겸의 대공수미법 시행안을 받아들여 우선 경기도에서 시험적으로 시행 할 것을 명하고, 이원익으로 하여금 시행세칙을 정하게 하였다.
이후 선혜법(善惠法)으로 명명된 경기도의 대공수미제도, 즉 대동법(大同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인 조정의 대신들과 방납(防納)하는 집단들이 끈질기게 반발함에 따라 경기도의 백성들의 열화 같은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의 확대 시행은 저지되고 만다.
수세(收稅) 및 역(役)의 공평한 시행을 위하여 호패법(號牌法)과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재원 확보에도 노력하였다. 선조 말에 시작한 창덕궁 재건공사를 끝내고 이어서 경복궁, 인덕궁, 자수궁을 중건하여 파괴된 수도를 복구하였다.
셋째, 폐위된 ‘광해’ … ‘인조반정’은 무엇인가?
광해는 미친 광기, 색(色)을 밝히는 군주, 정권 말 여자와 놀음에 빠지고 인륜도 버린 패악한 왕이었기에 폐위되었을까?
‘인조반정’은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과는 명칭부터 다르다. 되돌린 반, 바로잡을 정 글자 그대로 잘못된 체계를 바로잡아 올 바른 질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5년 전 온 나라의 눈길이 덕수궁 석어당으로 집중된다. 이른바 인목대비 폐모사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그해 왕실 최고의 어른이자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자격을 빼앗고 석어당에 감금 시킨 것이다. 왜 광해군은 이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인가?
그 이유는 광해군의 직위과정에 있다. 아버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왕위는 늘 불안했다. 정권 초기 서인과 남인 그리고 대북파는 연립정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소수파인 대북파가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다수파인 서인과 남인들을 축출하고 권력을 독점하려고 했다. 그동안 유지되어 오던 붕당 적 정치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많은 반발을 불러온다.
1618년 1월 대북파가 조정백관을 동원한 정청을 벌이며 모여 인목대비의 폐모를 요청한다. 8살 난 어린 아들 영창대군과 친정아버지를 한꺼번에 잃고 왕대비 지위마저 박탈당한 인목대비는 한 많은 유폐생활에 들어가고 대북파는 조정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하지만 동시에 대북파의 정권에 대한 반발도 커져갔고 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이 됐다. 광해군이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시킨 이 사건으로 그 당시 보편적인 사료들이 너무나 ‘극단적인 행위다’라고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광해군과 대척점에 서 있던 서인 세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격적인 쿠데타 논의가 시작된다.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바로 인조임금이다.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은 서인세력의 제의를 받고 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인조반정은 소수의 병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정격적으로 성공한다.
영화 속 ‘광해’는 결구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발언조차 함부로 책임 질 수 없는 비운의 시대의 왕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누구보다 진정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했으며, 명에게 대립한 유일한 조선의 왕이었다.
영화는 픽션과 사실의 경계 속에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역사 속 광해의 하나의 단면만이 아닌 또 다른 모습, 광해가 진정 이루고자 한 개혁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영화 ‘광해’는 관객에게 끝까지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답을 내려놓고 관객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광해’는 어떤 왕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