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타임즈 마태식 기자 ] 우리 현대사의 산증인 야성( 野星 ) 강창덕 선생 (93) 의 ‘토크 콘서트’가 1월 19일 저녁 대구 대명동 소극장 ‘함세상’에서 열렸다 .
김두현 수성구 의원이 사회를 맡아 대담 형식으로 이뤄진 이날 토크콘서트에서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선생의 삶의 순간들을 되돌아보며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다시금 다짐하는 자리가 되었다 . 생애 7번의 투옥과 13년의 감옥살이를 한 강창덕 선생은 1927년 경산 하양에서 출생했다 .
43년 일제 강점기 시절 17세의 나이로 강용생이란 사람의 영향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됐고, 이후 5명의 친구 중 자신을 주동자로 지목한 일제경찰이 최악의 하양경찰서 주재소 지하땅굴에 가둔다 .
일제경찰은 보천보 전투 , 민비 얘기를 하면 처벌한다며 위협했고 일본이 망하기 2달 전에 일본군에 입대하라고 강요했으나 강창덕 선생은 소집하는 날 누나 집으로 도망갔다 . 그리고 다시 붙잡혀 각서를 쓴 후 풀려났다 .
충신과 중국 역사에 박식했던 아버지와 홍길동 전 , 활빈당 얘기를 해 주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때 부터 생각이 남달랐던 선생은 이후 민주화와 평화통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용사가 되어 일제와 이승만 ,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 연이어 싸우게 된다 .
미군정 시절 소작도 잘 살게 하자는 토지 개혁 , 남녀평등을 주장했고 1945년 10월 민중항쟁에 가담한다 . 1947년 대구상고 3학년 야간부 시절 학생 웅변대회에서 ‘ 미국 , 유엔은 우리나라를 분단하지 마라 ’ 고 주장해 3번째 투옥이 됐고 ‘북진통일 반대 , 평화통일’을 요구하다 4번째 투옥이 됐다 .
그러나 지난 2010년 6월 10일에 는 민주화 운동에 공로가 많다며 그는 소년범 퇴학을 당한 모교( 대구상고 )로 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
토크 콘서트에 앞서 참석자들과 함께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던 강창덕 선생은 옛일을 회상하며 연신 흐르는 눈물을 딲았다 .
전쟁 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선생은 건국동맹 여운형 선생으로 부터 정치를 배웠고 영남일보, 매일신문 기자를 하며 이승만 정권 말기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 ( 1960년 5월 2일 자 코발트 광산 학살 보도 )을 보도해 유명해 졌다 . 정치깡패의 테러를 받기도 했다 . 이후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1972년 지하신문 ‘참소리’를 발간한다 .
대구봉덕시장에서 염소장사를 하며 유신반대를 했던 선생은 종신헌법을 반대 한다고 긴급 조치 1호 위반과 반국가 혐의로 백기완 선생과 함께 붙잡혀 갔다 . 선생은 1975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8년 8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 하지만 다른 8명은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이 돼 당시 정권이 국내외의 비난을 받았다 .
대담을 맡은 김두현 수성구 의원이 93세로 아직도 정정한 선생의 건강비결을 묻자 “ 내 건강 비결은 투철한 역사의식”이라고 말했다 . 또 민주당 대구시당 상임고문을 포함 7개 단체 고문을 맡고 있는 강 선생은 과거 여운형 선생의 ‘근로인민당’ , 조보암 선생의 ‘진보당 ’, ‘사회당’을 거쳤고 5.16 이후 남북관계를 푸는 데는 김대중 후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게 됐다고 밝혔다 .
“진보 쪽에서 나와 같이 하자고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내 역할을 다 하고 죽을 때 까지 내 역할을 다하겠다”며 민주당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나타냈다 . 또 평화통일 자주통일 하면 어디라도 뛰어 들어가 심부름을 하겠다면서 남북 , 북미회담에 문재인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대구역사탐방단이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남칠우 더불어 민주당 대구시당 위원장과 김우철 사무처장, 이헌태 북구 갑 위원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시.구 의원, 재야인사, 학생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