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삭제 주장은 한 풀 꺾인 듯싶다. 하지만 재창당 요구는 아직 뻣뻣하기 그지없다. 소위 쇄신파를 자칭하는 정두언 의원은 재창당을 “끝까지 주장할 것이고 관철시킬 것”이라고 공언하였는가 하면, 비박계(非朴系, 비박근혜계)의 권택기-전여옥-차명진 의원들은 재창당 논의를 위한 의원총회 소집요구서를 돌리기도 했다. 한나라당 정강정책 전문(前文)에서는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의 비약적 발전을 주도해온 발전적 보수와 합리적 개혁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적었다. 김종인 비대위원은 “외국 어떤 정당의 정강정책에도 보수라는 표현이 들어간 예를 찾기 어렵다.”며 보수 삭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보수 삭제 요구 측은 영국의 ‘보수당‘이 아예 당명부터 ’보수‘라는 대목을 쓰고 있다는 반박에 눌렸는지 그 후부터 수그러졌다. 보수 삭제나 재창당 요구 등은 원칙 없이 시류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한국 정치인들의 얄팍한 의식을 반영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정치인들의 뼛속까지 파고든 구태의연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안철수 바람,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소통하는 20-40 젊은 세대의 기성세대 반발, 부의 편중에 대한 반발, 등으로 확산되는 반(反)보수 사조에 편승한 기회주의적 반응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당을 해체하고 통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새천년국민회의로 바꾸었다가 다시 새천년민주당으로, 또 열린우리당으로 바꿨다. 그리고 다시 민주당으로 세탁하더니 얼마 전에는 민주통합당으로 또 다시 바꿨다. 그밖에 다른 군소 정당들도 마찬가지로 당 헤쳐모여를 식은 죽 먹듯 한다. 그런 건 정당이 아니다. 조폭의 이해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는 조폭 파벌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구미 정치 선진국들은 그렇지 않다. 1828년 창당된 미국의 민주당이나 1854년의 공화당이나 모두 아직까지 그 이름 그대로이다. 민주당은 1860년 공화당의 링컨에 패한 뒤 1912년 까지 50여 년 동안 1908년을 제외하고는 대선에서 모두 참패하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40여년의 굴욕 속에서도 한 번도 당 명을 바꾸거나 재 창당하지 않았다. 결국 민주당은 1912년 대선에서 승리하였다. 공화당도 1932년 후 18년 동안 집권에 실패하였지만 결코 당을 해체하거나 재창당하지 않았다. 1950년 공화당은 본래의 당명으로 대선에 나섰고 성공하였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집권에 실패하거나 시대적 조류가 크게 바뀐다 해도 본래의 창당 정신을 살리면서 시대적 변화에 적응해왔다. 1830년대 창당된 영국의 보수당도 똑 같이 보수를 표방하면서 한 번도 당을 해체 재창당 한 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당들은 창당 실권자가 바뀌거나 선거에서 참패하면 으레 당을 해체하고 재창당하거나 다른 당과 통합하기 일쑤이다. 재창당과 당명 바꿔치기는 자유당 정권 붕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50여 년 간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정당 정치는 조금도 개선되지 못한 채 각 분야 중 가장 후진적이다. 정당 재창당이나 통합은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이 “새 정치” “쇄신” 등을 내걸고 국민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날조해내기 위해 꾸며낸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때로는 재창당을 내세워 당내 경쟁자를 몰아내는 비굴한 출구로도 악용되기도 한다. 요즘 들먹이는 한나라당 재창당도 그런 음모와 무관치 않다. 이제 그런 구태의연하고 기만적이며 비굴한 작태는 그만 둘 때가 되었다. 쇄신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인들이 누구보다도 50년 묵은 구태의연한 정치의식에 사로잡혀있다. 한나라당은 재창당 이란 요식행위 보다는 새 쇄신이란 진솔한 내용으로 국민들에게 정직하게 다가서야 한다. 정용석 논설고문<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