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교과서의 왜곡이 도를 넘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일본이 백제를 지배했다”거나, “발해는 속국”이라는 내용이 기술되는 등 왜곡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국회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15일 일본 초등학교 사회교과서 5종과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 9종 등 14종의 교과서를 동북아역사재단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 이 같은 왜곡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한다.
역사는 상관관계에 있다. 한반도에서 열도로 이주해 간 사람들은 떠난 조국에 대한 기억과 기록이 치밀 할 수밖에 없으며, 떠나보낸 쪽에서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기록에서조차 잘 남지 않게 된다.
마치 창호지 문에 난 작은 구멍으로 바깥쪽을 보면 잘 보여도, 마당 쪽에서는 방 안 사정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왜 일본열도 구석구석에는 백제와 관련된 전설과 유물, 유적이 많은가? 저 멀리 규슈(九州)에서 오오사카(大阪)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흔적은 아직도 우리의 연구와 추적을 부르고 있다.
규슈의 쿠마모토현(熊本県)과 미야자키현(宮崎県)에 백제 또는 백제왕에 대한 유물과 전설, 신사가 있음은 결코 일본의 속국이라 볼 수 없음이다.
확실한 백제사(百濟寺)만도 일본에 4군데나 있다. 오오사카부(大阪府) 내에 두 군데, 나라현에 한 군데, 큰 호수로 유명한 시가현(滋賀縣) 산중턱에 또 한 곳이 있다.
나라현 코료쵸(廣陵町)에 있는 백제사는 서기 639년 대왕 서명(舒明)의 지시로 백제천(百濟川)을 동서로 나누어 백제궁과 함께 세워 진 것이다. 『일본서기』에 보면, 일왕 서명이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려 백제천을 기준으로 동쪽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백제궁(百濟宮)을, 서쪽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백제사를 짓게 했다고 나온다.
시가현의 백제사는 606년에 성덕태자(聖德太子)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고찰로 백제의 용문사(龍雲寺)를 본떠서 지어졌다고 한다(일부 서적에는 용문사(龍門寺)라 하나 - 한국 기록으로는 둘 다 찾을 수 없음).
인근에서 온돌 흔적과 지게가 나옴으로써 당시 한반도 사람들의 흔적임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왕인 박사가 정착한 오오사카부(大阪府) 히라카타시(枚方市)에도 백제사와 백제신사가 있으며, 의자왕의 아들인 경복(敬福)이 정착한 곳이다. 백제사 터가 남아 있으며 경내에 백제신사를 세웠다. 이곳은 백제 멸망 후 건너가 생긴 것이다. 이전에 이주해 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백제 멸망 후 쉽게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곳의 백제사가 오오사카 시내에 있다. 재일동포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츠루하시 근처(정확히는 칸죠센[環狀線]의 모모타니역[桃谷驛]) 근처이다. 현재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사찰로 바뀌어있다.
60년대 발굴 당시 나온 기와 명에서 <백제사>와 <백제니사(百濟尼寺)>라는 명문이 발견됨으로써 이곳 터가 ‘백제사’라고 밝혀졌다. 바로 그 주변이 고대에 <백제군(百濟郡)>이 있었던 곳이다. 아직도 근처에 백제역, 백제소학교(초등학교), ‘백제교’는 물론 ‘백제’라는 문패가 보이는 이유다. 당시에는 ‘리틀백제’였다라고 칭함이 옳을 것 같다. 오오사카 지역의 백제군은 14세기가 되어서야 폐군(廢郡)되었다.
아울러 백제군의 건치 연혁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백제 멸망전인 645년에 벌써 존재 해 있었다는 논문도 있다.
아울러 일본열도 내 백제 이주민 국가건설은 개로왕 시대에 이루어진 것 같다. 이미 곤지왕이 열도에 건너갔다는 일본 측 기록이 있으며, 동성왕과 무령왕이 열도에서 건너와 백제왕이 되었다. 이것은 백제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볼 수 있다. 즉, 백제의 협조와 협력을 받던 대왜(당시의 나라정권)의 힘이 열도 내 전체에 이르지 못하고 한반도의 삼한, 삼국이 일본열도 내에 분국을 갖고 있던 시대로 볼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북한의 김석형 교수(대구 출신으로 6.25 때 월북)에 의해 발표되었다.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기관 잡지 『력사과학』1963년 1호에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1966년 이를 보완한 「초기조일관계연구」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부터였다. 일본학계의 충격은 실로 컸다고 한다.
더욱 백제가 왜열도에 거점(분국)을 가지고 있었다는 논거는 중국 쪽에서 발견된다. 즉, 중국사서에 보면 한, 중, 일 역사서와 부합되지 않는 이상한 기록이 하나 전하고 있다.
그것은 남북조시대의 남조였던 송나라의 사서인 송서(宋書)의 기록으로, 478년 일본열도 내의 왜왕무(武)가 송나라 순제에게 바친 상표문의 내용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상표문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있었던 엄청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백제와 왜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귀중한 내용이 들어있다.
“신의 죽은 아비 제(臣亡考濟: 필자 注 - 濟는 개로왕으로 어렸을 때 일본열도의 분국 후왕 [왜왕제])를 생각해 보건데,.......,갑자기 죽은 부형의 상에 처하여(奄喪父兄).....,”라는 문구이다. ‘왜5왕시대’에 이루어진 상표문의 한 구절이다.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 앙숙 고구려에 대한 대군의 출동도 중지하고 긴 세월을 상중에 있게 되었다는데, 한, 중, 일 삼국 역사에서 부왕과 왕자가 같은 날 함께 죽은 사실은 일본열도에도 중국에도 없다. 오로지 백제 개로왕과 왕자 다섯 명이 고구려 군에 의해 아차산성에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만이 유일하다.
하물며 왜왕무를 일본학자들은 자신들의 천황인 웅략(雄略)으로 보았다. 그러나 왜왕무는 웅략이 아님이 거꾸로 일본 측 역사서가 스스로 입증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왜왕무는 누구일까? 왜왕무는 다름 아닌 소년 시절의 사마왕, 즉 무령왕이었던 것이다. 왜왕무가 상표문을 올렸을 때가 478년이고, 무령왕 지석에 따르면 무령대왕은 462년생이니 왜왕 무가 17살 때이다. 그리하여 사마왕 사후 시호가 왜왕무(倭王武) + 령동대장군(寧東大將軍: 521년 양나라로부터 받은 장군 호칭)의 무(武) 자와 장군호칭의 첫 자를 합쳐 무령왕이 됐다고 원광대 소진철 교수는 주장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한·일고대사 특히 무령왕에 대하여 일본에서 깊히 연구,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필자가 볼 때도 김석형 교수의 ‘삼한삼국에 의한 일본열도 내 분국설’이나 소진철 교수의 주장이 상당부분 옳다고 본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그들 안보의 최전선으로 여겨 대 한반도 외교를 아주 중요시해왔다. 나·당연합군의 일본열도 침공을 두려워했던 제명여왕이 백제멸망을 눈앞에 두고 엄청난 병력을 규슈까지 파견 했다가 원인미상 급사당하고, 그 유지를 받들어 왜대왕 천지가 전투선 1천 여척에 2만 7천여 명이라는 대군을 파견한 것은 두 왕조 간 혈연관계가 아니면 감행할 수 없는 국운을 건 결단이었다.
당시의 왜대왕 천지(天智)가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두려워 해 오오츠(大津-현재의 시가현 비와코 주변) 지역에 급조된 궁궐을 세운 것만 봐도 얼마나 연합세력을 무서워했는지 알 수 있다.
여러모로 비교 분석해 봤을 때 일본 역사교과서의 ‘백제 속국 시’는 어불성설이요, 역사왜곡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백제가 일본열도에 분국을 설치했고, 야마토정권과도 호형호제하던 협력관계였다. 결국 야마토정권도 하나의 백제계로 통합 된 것으로 봄이, 열도에서 나오는 유물, 유적, 전설과 부합된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