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탐관오리들의 발호와 나라의 운명!

  • 등록 2013.01.31 0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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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자들은 탐욕을 버리고 스스로 물러나야!

요즘 나라가 혼란스럽다.

 

고려 말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인데도 우리사회는 아직도 사회지도층의 탐욕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다.

 

인사가 만사이거늘 늘 소용돌이 속에 휩싸였다. 대개는 병역문제라든가 땅 투기 등 공직자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처사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낙마를 하고 마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러한 와중에 폭정을 일삼았던 mb권력의 임기 중 마지막 특별사면은 심란한 국민 가슴에 뜨거운 기름을 붓고 말았다. 친인척 및 측근의 특별사면을 여야와 국민이 반대하는데도 후안무치하게 밀어붙인 mb시대의 막장 권한 남용을 두고도 국민은 또 다시 억장이 무너진다.

 

mb가 마지막 인사로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을 헌법재판소장 후보로 낙점했다가 여러 가지 문제점 노출로 불명예를 안고 후보 본인은 오리무중 고심 중인 것 같다. 특히, 공직자로서 해서는 안 될 특정업무경비를 개인통장으로 받아 사용한 점 때문에 횡령 의혹까지 받고 여야의 청문보고서 채택 무산으로 앞날이 불투명 한 가운데 잠수 중이다. 그나마 자진사퇴만이 마지막 명예로운 길임이 명확해졌다. 그만큼 코너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판단하고 자시고도 없다. 빠른 자진사퇴만이 그나마 살 길 같다.

 

작금의 상황을 보면 어찌 그리 고려 말 상황과 오버랩되는지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에 경악할 따름이다.

 

이처럼 1% 상위 지도층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는 없고, 탐욕과 부도덕성으로 지탄의 대상으로 몰락함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영국 왕족과 같은 솔선수범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병역의무와 공직자로서의 부도덕한 땅 투기 같은 일은 없어야할 것이다.

 

고려 말 혼란하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도 기강을 잡으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했던 최영장군의 결단력으로 부정부패한 탐관오리들을 처단했음을 교훈으로 삼아야한다. 최영장군의 부패에 대한 불호령과 결단은 당시 백성들의 환호를 받고 있었음은 좋은 예이다.

 

일례로, 1379년 7월 큰 옥사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큰 실권을 쥐고 있던 이인임과 임견미 등은 북방에 나가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와 교만하게 구는 양백연을 매우 미워하였다. 그런 양백연은 친화력과 술수가 좋았던지 여색을 좋아했으나 승진은 빨랐다고 한다. 그가 여러 여자를 강간하고 이인임과 임견미마저 해치려했던 모양이다. 이에 공민왕은 최영과 장하 등 수사기관에 명하여 심문을 시켰다는 기사다. 최영의 총책임 하에 밀직부사 장하 등이 이 사건을 처리한 것이다. 그러나 전장에서 군기가 엄정한 최영인지라 일벌백계로 일처리를 하여 당시 세인들로부터 판결이 엄했다는 비판을 들은 것 같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보자!

 

“양백연은 성질이 민첩하고 몸치장하기를 좋아 하였으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좋아 하였다. 공민왕 때에 여러 관직을 거쳐 판각문사(判閣門事)가 되었다. 판밀직사사 신귀(辛貴)의 처 강씨(康氏)를 간통하였는데 강씨는 찬성(贊成)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중략)......, 마침내 관직을 박탈하고 합주(陜州)로 귀양 보냈다. 이날 저녁에 환자 임보(林甫)와 한진(韓軫)이 왕의 명령이라고 기만해 양백연을 소환하였는데 심부름군이 순찰관에게 체포되었다. 최영이 왕에게 말하기를 “상호군 전천길(全天吉)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양백연이 두 시중을 모해하고 자기가 수상이 되려 한다.’라고 하였으니 그 당파를 문초해 처벌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최영, 박보로(朴普老), 이원굉(李元紘), 장하(張夏), 양백익(梁伯益), 도흥(都興) 등에게 명령해 대성(臺省) 전법(典法) 기관들이 순군과 합동해 문초하게 하였다.”(『고려사』권114 열전 제27 양백연 참조)

 

앞문의 호랑이를 막으니, 뒷문의 승냥이가 나온다(前門据虎後門進狼 - 전문거호 후문진랑)라 했던가?

 

부패한 탐관오리 양백연을 일벌백계하니, 이번에는 이인임과 임견미가 또 다시 백성들을 괴롭혔다.

 

나라가 점점 망조로 흐르던 고려 말 이에 바람 타듯 한 몫 하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고위층 권세가들이었다. 특히 임견미와 염흥방 등과 같은 중앙의 권문세가들은 벌을 받고 폐족이 된 가문은 물론 예전의 동료와 일반 백성들의 토지에까지 손을 대며 사리사욕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야말로 뵈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이에 백성들은 그들을 저주하며 사회분위기는 묘하게 돌아갔다. 이에 더 이상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직감한 최영이 이성계와 함께 드디어 칼을 빼어들었다.

 

임견미, 염흥방 같은 권세가로부터 많은 토지를 수탈당한 백성들로부터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최영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그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를 몰수해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어수선한 민심을 수습하면서 정국 안정의 기틀을 다녀 나갔다. 이때 이성계도 적극적으로 그들 원망 받는 가렴주구의 고위직 탐관오리들을 척결하는 데 앞장섰다. 이처럼 두 군벌은 당시 백성이 가장 증오하며 원성을 사고 있던 두 고위직 인사를 척결함으로써 더욱 경쟁의 레이스를 밟아가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우왕 14년(1388) 1월 이후의 정국은 임견미와 염흥방 일파를 숙청함에 있어 중앙의 권력자 최영과 변방의 초신성처럼 나타난 무장 이성계가 주도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 말 부정부패한 탐관오리들은 최영장군에 의해 일망타진 되면서 한 때나마 정풍운동이 벌어졌고, 또 다른 한축이었던 군벌 이성계에 의해 그 기운은 마침내 조선개국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부정부패에 의한 탐관오리들의 발호는 나라까지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다.

 

큰 교훈으로 삼아야할 일이다.

장팔현 기자 jan8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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