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엽 칼럼니스트 ] 대한민국 사법사에 중대한 장면이 기록됐다. 지난 9일 서울고등법원이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파기환송심 재판을 헌법 제84조(대통령 불소추 특권)를 근거로 무기한 연기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법 조항의 적용일 뿐이라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단순한 법 절차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헌법 제84조는 “대통령 재직 중 형사상 소추 금지”로 해석되어 왔다. 대통령 당선 전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기소가 가능하고, 이미 기소된 사건에 대한 재판도 진행된다는 것이 법조계의 일반적 견해였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이를 뒤집었다. 대통령 재직 중이면 당선 전 범죄이더라도 재판 진행 자체를 정지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해당 사건은 제20대 대선 후보 시절 TV토론회에서의 허위 발언이 문제된 사안이다. 범죄 시점은 대통령 재직 중이 아니며, 이미 대법원까지 한 차례 판단을 거쳐 파기환송되어 다시 심리 중인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헌법 84조가 적용되어 재판이 멈췄다. 이는 앞으로 대통령의 형사적 책임을 두고 사법 공백 상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법의 기본 원칙은 “법 앞에 평등”이다. 대통령이라 해서 법적 책임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대통령 개인의 형사 책임 문제와 국정 수행의 안정성을 구분해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정치적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법치주의 원칙에 균열을 낸 셈이다. 향후 유사한 사건에서 대통령 직위가 사법 방탄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커졌다. 이미 정치권에서는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이러한 흐름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는 헌정사적 퇴행으로 기록될 수 있다. 대통령이 국정을 책임지는 동안 형사처벌을 유예하자는 취지가 전가의 보도처럼 남용된다면, 대한민국 법치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다. 대통령이라 해도 국민과 동일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헌법 84조의 적용 범위는 엄격히 해석되어야 하며, 이번 판결처럼 무리한 확장은 사법의 신뢰를 해칠 뿐이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일수록 더욱 그러해야 한다. 이번 사안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법치주의 수호 차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