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 미국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동서 냉전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닉슨과 마오쩌뚱의 만남은 미-중 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시대를 열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 길을 튼 것은 키신저 국무장관이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가였던 키신저는 팽창하는 소련에 위협을 느끼던 중국의 고민을 꿰뚫어 보고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 주언라이 수상과 미-중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다. 이때 주언라이 수상은 말한다. "이게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겁니다."
닉슨의 중국 방문이 발표되었을 때 반공 투사라는 그의 명성은 미·중 정상화가 수반할 이념적 충격과 저항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줬다. 그가 보수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인 중국 당국과 자유롭게 대화를 하고, 협력의 길을 열 수 있었다.
북한 핵문제의 뿌리는 지구상의 유일한 한반도 냉전이다.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포기하게 하는 해법의 핵심은 북-미간 적대관계와 냉전의 청산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냉전은 언제 누구에 의해 해체될 수 있을 것인가?
보수 반공주의자인 닉슨에 의해 미-중 간 냉전이 청산되었듯이 어쩌면 한국에서도 보수정권인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의 냉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팔을 걷어부친다면 훨씬 내부적 저항이 가볍지 않겠는가?
2005년 3월. 부시 대통령 2기 국무장관이 된 콘돌리사 라이스 장관이 한.중.일 3국 순방 길에 세종로 통일부 장관실로 나를 찾아왔다. 여러 명의 일행과 한반도 정세에 대한 의견교환을 마친 뒤 나는 라이스 장관과 별실로 옮겨 단독 대화를 했다. 당시는 북한의 2차 북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이 중단된 상태였다.
나는 라이스 장관에게 닉슨 행정부 시절 당신의 멘토인 키신저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중 수교를 이끌어 냈음을 상기하면서,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지대인 한반도에서 철조망을 걷어낼 수 있는 호기이며, 그 일을 해낼 적임자는 국제정치학자 출신인 바로 당신이고, 만일 성공한다면 이는 부시 정부의 역사적 업적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순간 나의 말을 경청하던 라이스 장관의 눈이 빛났다.
석달 뒤 나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핵문제와 6자회담 남북문제등에 대해 다섯 시간에 걸쳐 대화하고 토론했다. 김위원장의 모든 안테나는 워싱턴에 맞춰져 있었다. 미국의 당국자가 북한에 대해 말한 내용들을 날짜별로 기억하고 있었다. 김위원장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희망했다.
나는 우선적으로 북한이 중단된 6자회담에 돌아와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마침내 김위원장은 '미국이 자신을 대등한 협상 상대로 인정한다면'이란 단서를 붙여 회담 복귀를 약속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워싱턴을 방문하기 앞서 먼저 뉴욕으로 키신저 박사를 찾아갔다. 그와는 몇달 전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는 구면이었다. 나는 그에게 미국과 화해를 원하는 김위원장의 희망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키신저 박사는 나에게 워싱턴의 체니, 라이스, 럼스펠드 등 핵심인사들에게 잘 말해놓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석달 뒤 2005년 9월 19일 베이징 6자회담에서 북한은 핵무기와 핵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9.19 합의는 북한 핵위기 2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북한이 전략적인 결단을 내려 핵 포기를 선언하고, 그 댓가로 북한이 갈망해온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 추진을 받아낸 성공적 외교 작품이었다.
불행하게도 9.19는 바로 다음날 파기되었다. 돌연 9월 20일 미국 재무성은 북한이 불량국가로서 달러화를 위조해 마카오 BDA 은행에 숨겼으며 이를 조사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극력 반발했고 9.19합의는 휴지 조각으로 변했다.
훗날 미국의 고위관계자는 9.19 합의가 파기된 것은 당시 부시 정권 안에 두개의 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개의 정부란 라이스 장관이 이끄는 협상파와 체니 부통령이 수장인 강경파를 뜻한다.
2013년 봄. 한반도에는 다시 3차 핵위기가 몰아 닥쳤다. 박근혜 정부는 비교적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 외부의 우려와 달리 국민들은 동요가 없고 금융시장도 별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다.
이 고비를 넘기면 냉각기를 거쳐 국면은 변화할 것이다. 올 상반기가 지날 때 쯤 북-미간 비공식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이 때가 바로 한반도 냉전 해체를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지혜를 모아 팔을 걷어 부칠 때다. 그가 한국의 닉슨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정동영(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