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1일 제주도 3.1절 기념식에 총성이 울렸다. 기념식에 모인 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경찰의 위기감이 무고한 주민 6명을 살해했다. 살해된 이들은 초등학생, 아이를 안은 부인, 농부 등 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 전역에 파업이 일어났고 경찰과 미군정은 이들을 폭도로 몰아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서북청년단을 통해 강경 진압에 나섰다.
이에 맞선 제주도민 무장대는 한라산에 봉화를 올리고 제주지역 12개 지서를 습격하는 4.3사태가 시작되어 1954년 9월까지 무려 6년 동안 계속되었다.
4.3사태 당시 시대상황은 해방직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반대와 일본에서 돌아온 귀향자들의 실직, 민군정의 폭정, 서북청년단의 횡포, 일제배급 생필품의 고갈, 고물가, 친일경찰의 변신 등 세계 최빈국 수준의 생활상에 가혹한 정치까지 공존한 시대였다.
또한 4.3사태를 전후로 혼란과 6.25내전 발발로 양민들의 삶은 짐승의 삶이나 다름없는 세계 최하위 국가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정부수립 초기의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은 제주도 양민들을 빨갱이 좌익분자들의 무장봉기로 몰아갔으며 이로 인해 제주 도민의 1/9인 3만여명의 순진한 백성들이 학살 됐으며 그중 33%가 노약자, 여성, 어린이였다.
당시 무장대원은 최소 350명에서 최대 500정도였으며 그들이 가진 무기는 죽창 쇠스랑 등 농기구가 대부분으로 이들의 대부분은 가혹한 정치를 피해 산으로 도망한 사람들이였다.
실로 ‘가정맹어호(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치가 떨리게 실감나는 시대였다.
양민 학살의 주범은 누구인가?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친일파들을 등용하며 미군정의 눈치를 살피며 일당독재를 일삼았던 이승만이다.
제주 4.3 기념관에는 ‘가혹하게 탄압하라’는 내용과 함께 비공식적으로 ‘반항하면 제주도민을 다 죽여도 좋다’는 지시가 있었다. 국민이 준 국가권력으로 자국민을 죽이는 참담하고 야만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남로당의 개입이 있었다고는 하나 애초 무장대를 250명 정도라고 보고했던 군경은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도 무장대 250명이 있다는 보고를 계속해 왔고 이를 듣고도 학살을 멈추지 않은 인간 사냥꾼들 잔학상을 보여준 참상이다.
이후 제주4.3사태의 진실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제주 4.3사건 진실규명이 필요하다는 지시에 의해 1999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됐다.
이어 2000년부터 조사되어 2003년 3월 29일 조사위원회의 보고서 확정으로 진실이 밝혀졌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에게 사과했다.
분단된 나라의 현실이 사악한 욕심을 가진 위정자들에게 좌경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당했다.
또 지금까지도 그 희생은 아물지 않고 있으며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한 젊은이들과 애써 자식을 길러준 여인들이 핏덩이 자녀들을 두고 한서린 희생을 당했다.
이 희생을 누가 무엇으로 보답 할 수 있겠는가? 돈으로도 명예로도 숭고한 생명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희생당한 영령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념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이다. 그리고 분단되 현실 속에서 이와 같은 희생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4.3사태 희생자영령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통일이다.
통일은 나라가 해 주는 것도 아니며 정부가 해 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통일을 필요로 하는 국민들의 자발적 힘이 통일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독일의 통일은 작은 교회에서 시작되어 민간에 퍼지고 민간 주도하에 통일이 이루졌다.
대한민국 인권을 지키는 가장 근본 된 일이 통일이며 통일은 우리 시대에 이루어 다시는 정권 유지나 이념 논쟁으로 인권을 말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가 힘써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