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는 이번 "Exercises for Space"에서 종로 피맛골을 비롯해서 부산의 광복동과 초량의 차이나타운, 대구 서문시장, 통영 중앙시장 등지의 좁은 골목길에 늘어선 건물들을 앙각(仰角)으로 촬영한 사진의 일부를 잘라낸 다음, 그 이미지들을 다시 옆으로 이어 붙여서 만든 작품을 발표한다. ‘Euro-City(유로시티)’ 이후, 이질적인 공간과 사물들을 하나의 공간에 병치시켜서 잠재된 기억을 편린들을 가시적인 이미지로 재현한 "Fragments of Memory(기억의 단편들)’과 ‘Calling to Memory’ 등에서 보여준 것처럼 복수의 이미지로 작품을 구성하는 기법은 오래 전부터의 그의 작업 스타일이다. 이들에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기억의 재현, 그리고 중세 이후 우리의 세계관을 지배해온 원근법적 사고를 해체시키고 자유로운 다원적 시점을 회복하려는 그의 일관된 의지였다. 평면상의 화상에서 3차원의 현실을 읽어내는 것은 화면 안에 설정된 소실점을 기점으로 깊이를 가진 대각선상의 구도를 그려내는 원근법의 원리에 준거한다. 원근법 이전의 풍경이나 종교화에서는 물리적인 법칙이 아니라, 종교적 주제의 상징적인 중요성에 따라서 대상의 크기가 달라졌다. 19세기 중엽에 출현된 사진술은 원근법의 가장 완성된 재현 형태로서, 발명 이후 물리적 세계의 질서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인식의 방법으로 그때까지의 지배적인 세계관과 사고의 회로를 각성시켜나가게 된다. 인간의 망막에 들어오는 것은 단순한 2차원의 감각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단편적인 시각정보를 3차원의 현실로 인식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 축적된 감각기능과 뇌에서 실행되는 재구성 능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망막에 들어오는 감각 자료가 어떤 방식으로 파악되는가는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 획득되는 지적 능력에 따라서 달라진다. 원근법을 발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인간의 세계에 대한 원근법적인 인식이 이처럼 생득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의 실재감을 정교하게 재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원근법은 근대를 특징짓는 가장 근본적인 제도이자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다. 원근법을 기점으로 자연의 질서를 관이 가능한 것으로 대상화시킬 수 있는 시선의 권력이 형성되었으며, 근대의 과학문명을 비롯한 사상과 가치의 체계도 이런 원근법적 시각을 바탕으로 성립되어 나왔다. 하지만 바라보는 주체와 관점에 따라서 소실점이 달라지는 원근법은 중립적인 가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연을 대상화한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은 오래 동안 간과되어 왔다. 원근법의 훈련을 받지 못한 아이들의 그림은 대부분 깊이감이나 입체감이 없이 단순한 선과 색채만으로 그려진다. 인쇄물도 티브이도 접하지 못한 원시적인 환경에서 생활하는 원주민들은 그림이나 사진에 나타난 상의 윤곽을 손으로 더듬어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이 ‘영국 신사’의 얼굴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선천적인 장님이 성장한 후에 개안수술을 하고 시력을 되찾게 되었을 때, 생리적으로는 눈이 정상적인 기능을 가지게 되지만, 외계의 현상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는 사례도 보고되어 있다. 우리가 완전하고 합리적인 공간으로서 일말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원근법적 세계는 이처럼 직접적인 경험이나 생리적인 지각 능력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시대의 상징적인 제도이자 교의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는 원근법이 진실의 공간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시점이 고정되어 있어야 하며, 연속된 시공간에서 잘려진 현실의 단층이 주관에 의한 어떤 불순물도 개입되지 않은 완전히 객관적인 상태로 재현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전제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수많은 기준(視點)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또 그 기준의 정당성 자체가 수시로 달라지는 현대라고 하는 상황에서는 단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서 세계를 수렴시키는 원근법은 그 유효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김정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에 있다. 현실 대상을 단편(facet)으로 분리시켜서 확고한 조형의지로 재구축한 그의 작품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세계를 바라보는’ 안정된 인지의 체계를 교란시킨다. 무수한 소실점을 갖는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우리의 시선은 중심을 잃고 방황한다. 다시 말해서 다시점에 의한 그의 다면체 구조는 고정된 시점에서 바라보는 원근법적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현기증과도 같은 원초적인 감각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