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치면 운동장에 모이자.., 순식간에 300여명 대오형성 파출소 돌팔매 항의 』 모자를 눌러 쓰고 검정교복에 책가방을 손에 쥐고 등교 했다. 그러나 아침에 큰방 주인 할머니 댁 마루에 배달된 동아일보의 제호에 ‘귀교하는 고대생 정체불명의 깡패 피습으로 50여명 중경상’이란 큰 제목이 달린 신문을 보고 가슴이 뛰고 마음이 조급해 졌다. 1교시를 마치고 화장실에 갔을 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슬적 슬적 지나치며 종을 치면 운동장에 모이자는 것이다. 그래 종이 울리면 나가야지 하고 책가방을 싸 놓고 종소리 나기만 기다렸다. 올 것이 왔구나! 딸랑 딸랑 종이 울리며 판자마루 복도에서 “나가자 모여라” 하며 너나 할 것 없이 뛰어 운동장에 집결 순식간에 교문 밖으로 300여명이 대오를 지어 광주 일고 앞을 지나 바로 옆 충장로 5가에 다다랐다. 사거리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이렇게 시작한 데모가 시내 파출소를 모조리 돌 팔메로 부수며 상가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물을 떠주며 응원하여 사기가 충천했다. 저녁 7시 반쯤 되어 학동 파출소 앞에 이르러 2,000여 데모대가 돌팔매와 "마산 살인 경찰을 처단하라" 외치고 있는데 파출소 문이 열리며 총소리가 났다. 내 오른쪽 학생이 쓰러졌다. 우리는 재빠르게 가까운 전남대 병원 응급실로 이송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광주경찰서로 가자며 다시 데모를 시작했다. 경찰관의 조준 사격으로 7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는 유혈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나(정우화)도 이때 총상을 입고 4.19의 정신에 매몰되는 인연을 맺고 반평생 이 나라 민주와 정의 그리고 민족의 평화 통일이라는 사명의 파수군 임을 자부심이 멍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한 조직적 부정 “투표안하면 밀가루 고무신 안준다”... 아들을 찾아 온 마산을 헤맨 어머니 앞에 눈에 최루탄 박힌 시신이.. 』 조선왕조의 봉건시대를 거쳐 일본의 식민시대를 겪으며 억눌려 사는 것이 숙명처럼 여겨 체념했던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해방을 맞이하며 민족의 분단과 6.25전쟁 친일파의 재등장 헌법을 유린하여 영구집권을 향한 자유당의 횡포에 국민의 울분과 불신이 꽉 차있었다. 이렇듯 민심이 자유당과 국부 이승만에서 떨어져 가면서 1960년도 당시 5월 정·부통령 선거가 계획됐다. 자유당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이 출마했고 민주당은 조병욱이 대통령에 장면이 부통령에 출마했다. 같은 해 2.15일 대통령후보 조병욱 박사의 갑작스런 서거에 이승만이 대통령에 자동 당선돼 선거의 관심은 누가 부통령이 되느냐에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승만은 노쇠했고 정권의 실세는 부통령이 쥐게 된 판국이었다. 더욱이 대통령인 이승만이 죽기라도 하면 정권은 부통령에게 넘어가는 것은 불 보듯 훤했다. 이런 판세에 장면이 부통령이 된다면 자유당은 정권을 고스란히 민주당에 넘겨줘야할 위협에 처하게 됐다. 이에 자유당은 급기야 선거를 조기에 치르기로 마음먹고 불법 부정선거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선거를 감시해야할 경찰을 통해 선거 자금이 돌았고 마을마다 선거 투표율이 낮으면 밀가루와 고무신을 배급하지 않는다는 엄포도 있었다. 바야흐로 부정 선거가 극에 달했고 3.15부정선거는 자유당의 3인조 5인조 감시와 4할 사전 투표 등 노골적인 부정 살인 선거를 치뤘다. 당시 야당색이 강했던 마산에서 3월15일 궐기하여 8명이 사망한 의거를 시작으로 혁명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4.19의 기폭제가 됐던 남원 유학생 김주열군은 고등학교 입학도 해보지 못한채(당시는 고등학교 입학이 4월에 있었음) 산화한 것이 이때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자식을 마산으로 유학보낸 보낸 김주열군의 어머니는 3.15 부정선거 궐기대회 소식을 듣고 아들 소식이 없자 아들을 찾아 온 마산을 헤매고 다녔다. 마산 사람들은 아들 주열이를 찾는 어머니의 애끊는 통곡을 들었고 죽은 아들을 찾는 다는 소식은 온 마산에 퍼져 사람들의 가슴을 미여지게 했던 것이다. 급기야 4월 11일 김주열군은 머리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체로 발견됐다. 김 주열군의 시신은 신문지상을 통해 보도됐고 4.19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이승만대통령은 1주일 후인 4월 26일 하야성명에 이르렀다. 이날 4월 19일 정의의 함성은 시민과 대학교수 군까지도 지지를 보내면서 8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이기붕 부통령과 일당독재의 1공화국이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신 구파 싸움은 1년 후 5.16 쿠데타를 자초했다. |
『4월 19일 광주고를 비롯한 10여개 고등학교, 3만여 시민합세 시위 』 *[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이 글을 남기고 학우들과 함께 데모에 나갔으나 진압에 나선 군경에 미아리 야산에서 총탄을 맞고 꽃다운 목숨을 조국에 바쳤다. 그 정신을 잊고 살아있는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이 지역 광주는 4.19혁명의 3대발상지다. 3월4일 장면 부통령 광주공설운동장 유세장에서 전남대, 조선대생 10여명이 민주주의 염원 혈서를 쓰고, 3월9일과 12일에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원이 반공청년 당원에게 피살됐다. 4월19일 광주고교생을 중심해 숭일고, 광여고, 조대부고, 광주농고(자연과학고), 광주공고, 전남여고, 광주상고(동성고), 중앙여고, 살리시오고등 시내10개 고등학생 등 3만여 시민이 합세하여 격렬한 시위로 7명의 희생과 수 백 명의 부상자 가 발생했다. 4월20일 비상계엄하에서 전남대와 광주농고생이 시위를 시작 5,000 여명이 계엄군과 충장로일대에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렸다. 전주와 목포 순천 등 지방도시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이렇게 전국적인 시위에서 4․19혁명의 민주제단에는 186위의 고귀한 생명이 민주주권의 수호신으로 산화했으며, 6,400여명의 중. 경상자가 4월의 민주광장에 선혈을 뿌렸다. 이와 같이 희생의 대가를 치루고 쟁취한 위대한 4․19혁명은 제2공화국에서는 “혁명”으로 자리 매김이 되었으나, 4․19 1년만에 총. 칼로 민주정권을 무너뜨린 5․16군사쿠데타 정권은 4․19를 5․16 쿠데타의 예비적 사건인 “의거”로 규정하는 것으로써 사실상 4․19를 폄하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로 헌법을 개정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담고 있다. * 참고 [ 不義에 抗拒한 4ㆍ19民主理念을 계승하고, 祖國의 民主改革과 平和的 統一의 使命에 입각하여 正義ㆍ人道와 同胞愛로써 民族의 團結을 공고히 하고, 모든 社會的 弊習과 不義를 타파하며, 自律과 調和를 바탕으로 自由民主的 基本秩序를 더욱 확고히 하여 自由와 幸福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헌법을 개정한다] |
4.19와 5.18은 민주주의의 산소 돈으로 계산할수없는 가치..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5.16군사 쿠데타에 의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헌법을 통해 장기집권 정권연장에 들어갔다. 당시 민주화 세력은 호남의 김대중과 부산의 김영삼이 두 축을 이루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9년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을 자행했고 이로 인해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됐다. 그러한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됐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했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명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비록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부마사태 진정에 나섰던 김재규는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함으로 유신종말을 앞당기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서막을 열게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뒤로 한 채 전두환은 12.12사태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됐고 전두환 집권 후 광주 전역에 5.18 민주화 항쟁이 시작됐다. 전두환의 집권 말기에 이르러 대통령 직선제 요구와 민주화 열망은 노태우의 6.29선언을 만들게 됐다. 4.19로 부터 이어진 민주화운동은 5.18로 이어져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꽃피워 세계 민주화 운동사에 남는 우리의 소중한 정신 문화유산이 됐다. 이 민주화의 가치는 수많은 선열들이 피를 뿌려 후세에 남긴 민주주의의 빛이며 보석이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것은 4.19와 5.18같은 정신적 산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공기를 마시고 살면서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이제 4.19 하루 만이라도 선혈들이 피뿌려 가꾼 민주주의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4.19 기념탑, 4.19혁명 기념관, 4.19 문화원등 명맥유지.. 광주 4.19기념사업은 아직 미약하다. 그중 몇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한다. 4.19 단체 중 광주4.19기념사업위원회(회장 이병렬)가 있다. 당시 4.19의 주역 이었던 광고 10회를 중심인 단체로 광고내에 기념탑과 와비, 유적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또 4.19 기념사업에 큰 공을 세운 분이 계신데 4.19 문화원의 김영용 원장이다. 김 원장은 95년 당시 강운태 관선 시장시절 ‘4.19 30년사’를 편찬해 자칫 유실 될 수 있는 4.19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또 2002년도 박광태 시장 초기에 정부 교부금 15억과 시예산 15억을 들여 ‘4.19혁명 기념관’을 건립했고 ‘4.19 혁명자료사’를 편찬해 4.19관련 생생한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또 광주공원에 ‘4.19문화원’을 개원해 4.19기념탑을 찾는 많은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4.19 정신을 계승하는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6. 끝으로 4.19 후배들에게 바라는 한마디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시대 4.19 5.18 민주화 정신 계승을 통해 변화해야 과거 많은 민주화운동을 했던 선열들이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일해 왔다. 유독 광주는 의향이라는 이름과 함께 세계사에 빛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우리 사회는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못한다’는 말처럼 정의에 대한 사고가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다. 개인간의 신뢰가 떨어져 있고 많은 물질로 풍족한 생활속에 있어도 행복지수는 낮아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심각한 사회 병폐를 고치고 세계속의 광주를 심어갈 수 있는 정신문화가 있다. 그것은 4.19와 5.18이라는 정신적 밑거름이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전이며 거룩한 터전이다. 4.19와 5.18이 따로 일 수 없고 너와 내가 따로 일 수 없는 것, 민주화의 정신을 살려 서로 보둠고 같이 갈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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