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宋秉畯)은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따라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일본군 통역관으로 대한제국 귀국한 후부터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신하여, 비밀리에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李容九)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이때 일본군 병참감 오오다니 소장의 통역을 맡으면서 용산지역에 일본군 사령부에서 주보(酒保: PX)를 경영했다.헤이그 특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병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여론을 조작,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 이후 송병준은 경술늑약 늑결에 대한 공로를 인정 받게되어 한일 강제 병합 후 일제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게 되었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