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魚允中)은 1877년 홍문관 교리를 거쳐 전라우도 암행어사에 임명된 뒤, 만 9개월 동안 전라도 일대를 돌아보고 12개조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전라도 지방의 문제가 주로 수취제도의 문란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잡세의 혁파, 지세제도의 개혁, 환곡제도의 폐지, 삼수포세의 폐지, 재결감세(災結減稅) 등 제반 수취제도의 개혁을 주장했고 궁방전과 아문둔전의 개혁, 지방수령의 5년임기 보장, 도량형의 통일, 조운선(漕運船) 제조, 역로제도(驛路制度) 개혁 등을 주장했다. 1881년 조정에서 신사유람단 60명을 일본으로 파견할 때 박정양(朴定陽)·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반장인 조사(朝士)로 선발되었다. 유길준(兪吉濬)·유정수(兪定秀)·윤치호(尹致昊)·김양한(金亮漢) 등의 수행원과 통역관·하인을 거느리고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약 3개월에 걸쳐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설·문물·제도 등을 상세히 시찰하고 많은 참고자료를 수집했으며 다른 조사들은 같은 해 7월에 귀국했고 수행원인 유길준과 윤치호를 일본에서 더 공부하도록 남겨놓았다. 청에 파견한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과 합류하기 위하여 일본을 떠나 9월 상하이를 거쳐 톈진에 도착했다. 어윤중은 김윤식과 청에 유학온 우리나라 공학도(工學徒)를 만나고 당시 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 해관총독(海關總督) 주복(周馥) 등과 회담한 뒤 이해 12월에 귀국하여 1년간에 걸친 일본·중국 시찰의 복명서(復命書)를 제출하고 국왕에게 그가 견문한 사실과 우리나라의 개화를 위한 정책을 개진하여, 초기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큰 작용을 했다. 1882년 4월 조미통상조약 문제를 심의하고 조미수호조규에 합의했으며, 영국대표와 만나 조영수호조규를, 독일대표와 조독수호조규를 협의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와 함께 귀국했다가 군란이 평정된 뒤에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어 불평등조약인 조중수륙무역장정(朝中水陸貿易章程)에 조인했다. 1883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와 중강무역장정(中江貿易章程)·회령통상장정(會寧通商章程)을 협정했으며, 또한 도문강(圖門江)의 국경지대를 조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