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閔泳翊)은 187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조참의를 거쳐, 1879년 도승지·호조참판에 이르고 1880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軍務司堂上), 별기군의 교련소당상을 역임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때까지 윤웅렬(尹雄烈)과 함께 별기군의 책임자로 있었다. 제물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으로 사절단을 파견할 때 김옥균과 비공식 사절로 동행하여 일본의 개화된 문물을 보고 돌아왔다. 이후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로 톈진에 파견되어 해관 사무를 교섭했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다음해 5월 주한공사로 L. H. 푸트가 조선에 오자, 조선 정부는 친선 사절로 보빙사(報聘使)를 미국에 파견했다.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여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 등 8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83년 7월 하순 인천을 출발해 나가사키·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9월 18일 미국 대통령 C. A. 아서를 접견하고 국서를 전달했다. 민영익은 보스턴으로 가서 세계박람회와 공공기관을, 뉴욕과 워싱턴에서 정부기관을 시찰하면서 미국 제도에 관한 각종 지식을 습득했으며 우정국(郵政局) 설치, 경복궁의 전기 설비, 육영공원 설립·운영 등의 실현 계기가 되었다. 유럽을 통해 귀국한 뒤 혜상공국 총판·이조 참의·금위대장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개화파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 제거 대상자로 지목되어 큰 부상을 입었으나, 홍영식의 도움으로 구출된 뒤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H. N. 알렌의 치료를 받아 3개월 만에 회복되었다. 그 뒤 친군영(親軍營)에 복직했고 청나라가 조선의 친러시아정책을 견제하기 위하여 임오군란 때 납치한 흥선헌의대원왕을 돌려보내려 하자, 1885년초 청나라에 들어가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이를 반대하였으며 청나라의 반대로 협상이 결렬되자 홍콩·상하이를 전전하다가 귀국했다. 귀국 후 협판내무부사·병조 판서가 되었다. 1888년 연무공원판리사무(鍊武公院辦理事務), 1894년 선혜청 당상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