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金奎植)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했다. 1919년 3월 파리에 한국대표부를 설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고한민족의 주장·대한국의 광복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불법 침략과 한민족의 대한 광복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 김규식은 1919년 8월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지냈으며 1920년 10월 중국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학무총장을 맡았다. 1932년 11월 남경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1935년 6월 민족혁명당 주석으로 선임됐다. 1942년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임시정부가 강화되었고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임되었으며 1944년 2월 임시정부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8·15 대한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의 선발대로 1945년 11월 23일 귀국했으며 12월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둘러싸고 민족 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가 없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고 12월 과도입법의원이 설립되자 의장에 선임되었다. 한국문제가 국제연합으로 이관되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민족분단이 가시화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했다. 김규식은 1948년 2월 국제연합(UN)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안이 통과되자, 분단을 막고 민족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한 모든 정치세력 간의 협상을 주장하며 김구와 함께 북한 당국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했고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4월에 남북연석회의와 요인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하였으며 4월 21일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요인회담을 가졌다. 김규식은 5월초 서울에 돌아왔고, 남한만의 5·10 총선거에 불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