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李相卨)은 1896년 성균관(成均館) 교수가 되고, 탁지부(度支府) 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했을때,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에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상설은 1905년 법부 협판,의정부 참찬을 지내며 외국 서적을 참조하여 만국공법(萬國公法)등 법률을 번역하고 연구했으며 을사늑약 당시 을사늑약 강제 늑결의 결사 반대와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조 광무제에게 5차례 올렸고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국권 회복,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06년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 지역인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에 논의하였고, 간도 용정촌으로 가서 여준,왕창동,박무림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서전서숙을 문을 닫아야만 했다. 1907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고조 광무제는 이상설을 정사로 하고, 고조 광무제의 어명을 받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헤이그 특사에 실패한 이상설은 1908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하며 미주 한인 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 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러시아와 간도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 운동 기지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하고자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 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고조 광무제에게 13도 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조 광무제의 러시아 망명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 정부의 수립을 시도했다. 1910년 연해주와 간도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 강제 병합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 러시아, 청국에 일제의 침략 규탄과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와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권업신문"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들을 확장시켰으며 한인 교포의 경제 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이상설은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한인들을 모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 등과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