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李儁)은 189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참여했으며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여 정치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 총무를 맡아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아 결국 일본의 요구를 저지시켰다. 12월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 회장을 맡아 반일투쟁을 주도했다. 1905년 윤효정(尹孝定)·양한묵(梁漢默) 등과 같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으며,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늑결하자 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으며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발기하여 유학생들의 장학사업에 힘썼다. 1906년 평리원(平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활약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한성에 국채보상연합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주도했다.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2회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늑결된 것이므로 무효를 선언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에 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준은 헤이그 특사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4월 22일 한성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했으며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하여 6월 25일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고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조 광무제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공식적인 한국대표로서 회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 세 헤이그 특사단은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폭로·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언론기관을 통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이준 특사는 세계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참석의 길이 막히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순국(殉國)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