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경 개화사상가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兪吉濬)은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읽은 후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관한 책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1877년 2월 박규수가 병사한 후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시인(詩人) 강위(姜瑋)의 지도를 받으면서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1882년 10월 13일 박영효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사절단(使節團)은 3개월간 일본의 각 기관을 시찰하고 지도자들과 만났을 뿐만 아니라 각국 사절과도 폭넓게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했다.유길준은 사절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다. 외아문 주사(外衙門 主事)를 지내고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신문 발간을 도왔다. 보빙사(報聘使)의 수행원이 되어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았고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가 E. S.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바이필드의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유럽 여행 후 1885년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고 1895년 서유견문(西遊見聞)을 발간하였다. 일본에 있던 유길준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조 광무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늑약이 늑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완강하게 반대했으며 흥사단(興士團)을 만들어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저술·간행했고 사범학교를 설립·운영했으며, 소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려고 했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자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를 설치·운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