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申采浩)는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1월 20일 장지연의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 집필을 도왔고 장지연이 투옥되자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으며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910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4년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1915년 북경에 체류하고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으며 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고 1919년 2월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다. 4월 11일 임시의정원이 개회하였고 신채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독립운동의 외교우선론을 비판하였으며 1922년 임시정부의 쇄신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고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70개의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고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하고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