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李相龍)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서 거의하고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年)을 지원했으며 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으며,1909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지내면서 시국강연을 개최했다. 1909년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에서의 결정에 따라 독립운동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1911년 2월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최초의 간도지역 항일자치단체로 개간과 영농에 종사하는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경학사장에 추대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했으며 산업·교육 우선주의와 군사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퉁화 현 합니하(哈泥河)에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허혁(許赫)에 이어 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신흥강습소도 이전하여 제2의 기지를 정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서간도(西間島)의 독립운동도 무장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류허현 삼원보(三源堡)에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했고 임시군정부(臨時軍政府)를 조직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 최고책임자인 독판(督辦)에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하여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했다. 간도와 연해주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1년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 관뎬현에서 남만통일회를 개최하여 서간도 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조직했다. 대한독립군단 등 8단9회(八團九會)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했다. 1923년 서로군정서를 어무현에 이전하고 민병제를 실시하여 주경야병(晝耕夜兵)의 훈련을 실시했다. 1924년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에 선출되었으며 1925년 임시정부가 국무령제로 바뀌면서 국무령에 취임했다. 임시정부 의정원이 미국의 조선위임통치안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탄핵하여 대통령에서 해임하였으며 임시대통령 박은식의 지휘 아래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무장운동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이상룡을 국무령에 추대하였다. 1926년 사임하고 서간도에서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지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