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尹奉吉)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고 간도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의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과 함께 간도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했으며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했다. 1931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교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말총모자 공장 미리공사(美利公司)에서 일을 하며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면서 영어학교에도 다녔다. 김구는 일제가 상하이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전승축하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탐지하고 폭탄 투척 거사를 준비했으며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선서를 했다.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식장에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爆殺)했다. 거사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훙커우 공원 거사는 대한광복운동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고 중국인들에게 대한국인의 광복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임시정부가 장제스 국민당 정부와 항일연합전선을 펼쳐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