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張志淵)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을미독립운동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조 광무제의 경운궁 이어를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2월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조 광무제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짓고 독소(讀疏)를 맡았다. 1897년 7월 사례소 직원에 임명되었고, 9월 내부 주사를 겸직했다.1898년 4월 대한황성신문을 발행하는데 참여했고, 9월 남궁억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의 주필을 지냈다. 9월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어 취임했다. 1900년 10월 "시사총보"를 출판사인 "광문사"로 개편, 설립할 때 참여해 편집원을 맡아 정약용의 "목민심서","흠흠신서"등을 간행했다. 1901년 황성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02년 8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3월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 개선을 촉구하는 "정치 경장에 관한 주요 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윤치호,이달용과 함께 일본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을사늑약이 늑결된 사흘 후인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투옥되었다. 을사늑약을 규탄한 시일야방성대곡은 1905년 11월 27일 대한매일신보에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되어 기사로 나갔다. 교육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나아갔고,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를 조직하여 친일단체 일진회와 정면 대립을 전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