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李容翊)은 1887년 광무국(鑛務局)이 설치된 이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을 관리했다. 1890년 서북광무감리, 1896년 서북제부금광사무감독(西北諸府金鑛事務監督)을 거쳐 1897년 각부각군금은동철매탄각광사무(各府各郡金銀銅鐵媒炭各鑛事務)에 임명되어 전국 광산을 감독하였고 1898년 궁내부 소속 광산감독사무가 되어 황실 소속의 광산을 관장했다. 1897년 전환국장이 되어 백동화(白銅貨)를 대량 발주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했으며 1903년 중앙은행조례·태환금권조례(兌換金卷條例) 등을 반포했다. 1904년 내장원경(內藏院卿)을 겸임하며 대한제국 황실 재정 강화에 노력했다. 각 도에 광산감리를 임명하여 광산을 관리하게 하고 역토(驛土)·둔토(屯土) 등 국유지를 내장원에 귀속시키고 봉세관(捧稅官)이 도조(賭租)를 징수했다. 홍삼을 제조하는 삼정과(蔘政課)를 증설하여 홍삼의 제조 및 판매를 관장하며 전매했으며 1898년 철도사(鐵道司)를 설립하여 감독을 맡았고 궁내부에 서북철도국이 설치되자 서북철도 감독을 맡아 경의선·경원선 부설을 추진했다. 1901년 지계아문총재관(地契衙門總裁官)이 되어 토지소유자에게 지계를 발행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법인(法認)하는 지계사업과 양전사업을 담당했다. 1904년 탁지부 대신 겸 육군 참장으로서 대한제국의 국외 중립을 주장하였으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강력히 반대했다. 1905년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를 비롯하여 보성중학교 및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 열강에 널리 알리려고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