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尹致昊)는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朝士)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1883년 4월까지 체류했다.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 L. H. 푸트의 통역으로 귀국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통역으로서 푸트와 고종, 개화파 간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간섭 배제와 미국과의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에 힘썼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의 외부 협판과 박영효 내각의 학부 협판을 지냈으며 1896년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1897년 독립협회 운동을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 등 국민계몽 활동에 힘을 쏟았다. 1898년 3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관하여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8월 2대 회장이 되었으며 10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최,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의 확대와 산업 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 계몽에 노력했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