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申圭植)은 1902년 보병 부위(副尉)까지 진급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지방 진위대(鎭衛隊)와 연결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했고 1907년 군대해산 후 윤치소(尹致昭)·신창휴(申昌休) 등과 함께 광업회사를 발기하고 실업계를 계몽하기 위해 월간지 공업계(工業界)를 창간했으며 1901년부터 문동학교(文東學校),중동학교(中東學校),청동학교(淸東學校)에 관여하여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에 참가했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맹, 10월 우창 의거에 참가했다. 1912년 5월 망명자들과 상하이 교민이 늘어가자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사(同濟社)에는 박은식·김규식·홍명희·신채호·조소앙·문일평·여운형·장건상 등이 참여했는데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르렀고 중국 상하이 본부 외에 베이징·톈진과 간도·연해주·구미·일본 각지에도 지사를 설치했다.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발기하고, 환구중국학생회에 가입했다. 한인학생의 중국 및 구미의 각급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교육기관으로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군사교육을 위해서 약 10년간 100여 명의 학생들을 바오딩 군관학교, 난징 해군학교, 톈진 군수학교에 입학시켰다. 이상설·박은식 등과 협조하여 고조 광무제를 수반으로 하는 망명정부를 구상하고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했다. 여운형·장덕수·김철(金澈)이 발기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조직에 협력해서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4월 여운형·선우혁(鮮于赫)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으며 4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이 되었다.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1921년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자 5월부터 국무총리대리와 외무총장직을 겸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