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李會榮)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1906년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을 책임자로 삼아 동지 획득과 한인 교육에 주력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 늑결의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조 광무제에게 건의하고,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간도로 파견했다. 동지들을 평양 대성학교, 안동 협동학교, 정주 오산학교에 파견하고,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했다. 1909년 양기탁(梁起鐸)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이승훈(李昇薰)·김도희(金道熙)와 신민회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류허현 삼원보 추가가(鄒家街)로 건너가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1911년 최초의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1912년 퉁화현 합니하반(哈泥河畔)으로 옮겨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했다.1918년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과 밀의한 뒤 고조 광무제의 국외 망명을 계획하였으나 일제 총독부의 독살에 의한 고조 광무제의 붕어로 실패했다. 1919년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