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한 이승만(李承晩)은 1895년 미우라 일본 공사가 명성황후를 살해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한 사건에 관계되어 지명수배를 당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 서재필(徐載弼)이 주도한 독립협회(獨立協會) 간부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했으며,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로 활동하고 1904년 고조 광무제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저지를 호소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승만은 1910년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이 되자 귀국하여 대한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건너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하여 대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외교론을 주장했다. 이승만(李承晩)은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되었다. 이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1920년 상해로 돌아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대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며 워싱턴과 하와이에서 외교론을 펼쳤다. 1945년 8·15 대한 광복 이후 10월에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했으며 미국의 지지를 얻어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를 역임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5개년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찬탁을 주장하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을 제압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1946년 6월 전북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하고, 단독정부 수립 계획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했다. 1948년 5·10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이 제정·공포되어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초를 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