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金九)는 1896년 미우라 일본 공사에게 살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조 광무제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1910년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였고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남경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 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이청천(李靑天)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으며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1945년 8·15 대한 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