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윤(李範允)은 간도(間島)의 대한국인 보호를 위해 1902년 6월 간도시찰원으로 파견되었으며, 1903년 10월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가 되었다. 토문강(土門江)에 거주하는 대한제국 한인들을 순찰·위로하고 호구를 조사하여 1만 3,000여 명을 편적(編籍)시켰다. 간도의 대한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장정을 모집하여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해 군사훈련을 시키고 모아산(帽兒山)·마안산(馬鞍山)과 두도구(頭道溝) 등에 병영을 설치했다. 10호를 1통(統), 10통을 1촌(村)으로 하는 행정체계를 수립하고 도민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군대유지비를 충당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군대에 가담하여 사포대를 이끌고 나가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고 러시아 황제에게 훈장을 받았다. 노키에프스크로 가서 최재형(崔在亨)이 세운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최재형·이위종(李瑋鍾)·엄인섭(嚴仁燮) 등이 조직한 동의회(同義會)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모금활동을 추진했으며 이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의병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최재형·이위종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의회(彰義會)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최재형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3,000여 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러시아의 퇴역장교들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5연발총·14연발총 등으로 무장했다. 1908년 러시아와 간도 국경에 위치한 합십마구(哈什馬溝)에 전초기지를 두고 100명 내외의 소부대를 편성하여 동간도, 두만강 하류로 나누어 기습적으로 도강(渡江)·진공하여 일본군을 공격했다.1909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류인석(柳麟錫)과 회합하여 항일전쟁에서 서로 협조하기로 했다. 1910년 6월 러시아령 안의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류인석·이상설(李相卨)과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여 류인석을 도총재(都總裁)로 추대하고 창의총재(彰義總裁)가 되었다. 8월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했으며, 강제 합병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류인석 명의의 강제 합병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선언서를 각국 정부에 보냈고 러시아와 간도의 한인들에게는 강제 합병 반대를 위해 무장투쟁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표했다.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류인석·최재형·최봉준(崔鳳俊)·이상설·홍범도 등과 함께 권민회(勸民會)를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1918년 신채호(申采浩)·김동삼(金東三)·박용만(朴容萬) 등 38명과 함께 길림에서 무오 대한광복선언서를 발표하여 한일 강제 합병의 무효를 선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