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남일(沈南一)은 1905년 을사늑약 늑결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었고 곡창지대인 호남 일대에 일제의 경제 수탈이 극심해지자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907년 후반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기삼연 의병장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2월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 총살되고 김율, 김태원 등 수뇌부를 비롯한 다수의 의병이 전사하여 의진이 와해되자 굳건한 항일의지로 의병을 다시 불러 모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선봉-중군-후군의 전통적인 삼군체제를 확립하고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하여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키는 등 의진의 기강을 바로 세워 민심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대일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을 비롯하여 1909년 음력 7월 장흥 봉무동 전투까지 일본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등 전남 중남부 지역 대표적 의병부대로 성장한 심남일 의진은 일본의 국권강탈과 경제적 침탈, 단발 강요, 일본인관리의 임명, 군대해산과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 등에 대하여 강력히 반발하고, 친일세력과 일본세력 구축을 기치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의진 간의 연합을 주장하고 전남의 동부 안규홍 의진, 서부 전해산 의진 등 여러 의진과 두로 접촉하여 호남동의단을 결성하고 연합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하고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 8월부터 2개월간의 토벌은 살육, 방화, 약탈, 폭행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어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피살, 체포되었다.1909년 10월 9일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체포되었고, 1910년 10월 4일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