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은 152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풍기군수 재임 중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