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任士洪)은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에 급제,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홍문관교리·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재직중 훈구파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당하여 사림파 공격의 표적이 되는데, 1478년(성종 9)에는 류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공주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으나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1490년 관압사(管押使), 1491년 선위사(宣慰使)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8년 류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사림파를 축출하자, 이들과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그의 아들인 희재(熙載)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 연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함께 모의, 연조의 생모인 윤비(尹妃)가 폐위·사사된 내막을 연조에게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성종 대의 중신과 사림들이 대거 제거되었는데,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어 중종반정 이후 다시 중앙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했으며 이어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가산도 몰수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