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成三問)은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신숙주·하위지·이석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했다.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신숙주·최항·박팽년·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453년 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 어린 단종의 보필세력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정권·병권을 장악했다. 이때 정인지·박팽년 등 36명과 함께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의 공이 있다고 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단종복위운동은 그를 포함하여 집현전 출신 관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세조가 즉위 직후부터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왕의 전제권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취하자 집현전 출신 유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박팽년·권자신(權自愼)·이개·류성원·윤영손(尹鈴孫)·김질(金礩)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1456년6월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것을 기회로 삼아 세조와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으나 거사 당일 한명회의 제의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거사를 중지했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다음날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의 불충(不忠)을 꾸짖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성승·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박쟁(朴崝)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능지처형(凌遲處刑)을 당했다.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처형·유배 등을 당했으며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등 남자는 모두 살해되어 혈손이 끊기고 아내와 딸은 관비(官婢)가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