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洪景來)는 1800년 박천의 청룡사(靑龍寺)에서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우군칙과 함께 변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면서 향촌에서 부를 축적하여 지방유력자로 등장한 계층과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사상인(私商人) 및 조선정부의 지방차별정책으로 관로가 막혀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지식층들에게 접근, 이들을 포섭했다.가산역(嘉山驛)의 관리 이희저(李禧著),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장사 홍총각(洪總角)·이제초(李濟初), 태천의 김사용(金士用) 등이 합류하게 되었다. 각지의 기인(奇人)·도사(道士)·술사(術士)·무인(武人) 등을 계속 규합하는 한편, 가산의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삼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자금 마련을 위해 한성의 유력자 김재찬(金載鑽)을 통해 평안감영에서 공납금 2,000냥을 차용하기도 하고,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옥(任尙沃), 정주의 부호 이침(李琛)·김약하(金若河), 안주 상인 나대곤(羅大坤), 송상(松商) 박광유(朴光有)·홍용서(洪龍瑞)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한편 운산 촉대봉에 광산을 개설하고 광산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구실로 유랑민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각종 물자와 무기를 구입·제작하여 다복동에 비축해두었다. 1811년 10월 경 비밀 거점으로 삼은 가산의 신도(薪島)에서 이듬해 정월에 거병할 것을 결정하고, 주축 세력을 다복동에 결집시켜 군사지도부를 선정했다. 그러나 12월 중순경 움직임이 탄로나자, 12월 18일 거병했다. 농민군은 우선 가산 군아를 습격하여 군수 정시(鄭蓍)를 죽이고, 군대를 남북으로 나누어 각 군읍을 공략했다. 향반층의 내응을 받는 가운데, 북진군은 곽산·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 등을 점령했고, 남진군은 박천을 점령했다. 그러나 진격목표를 놓고 지도부 내에서 의견이 갈려 4일간 지체하는 사이에 평안도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 등의 군사 1,000명이 안주로 들어오고, 중앙에서 파견된 양서순무사(兩西巡撫使) 이요헌(李堯憲)의 정예군도 합세했다. 홍경래는 박천 송림리(松林里)에 진을 치고 군사를 3진으로 나누어 싸웠으나 관군의 초토작전에 밀려 참패하고 정주성으로 물러났다. 1월 중순경 다른 지역들이 관군에게 점령되어 고립된 상태에서 끈질긴 항전과 인근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4개월가량 버티었으나, 4월 19일 관군이 성 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폭파시켜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와 농민군은 진압되었으며, 그도 교전중에 총에 맞아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