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崔南善)은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국비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이광수 등 유학생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1906년 7월 유학생 회보인 대한흥학회보 편찬회를 맡아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편집 활동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1907년 5월, 귀국한 뒤 우리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8년 신문관을 창설하였다.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새 시대의 주인공을 위하여 1908년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을 발행하였다.이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였으며, 1910년 3월 안창호와 함께 청년 학우회를 설립하여 청년학우회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내면서 청년학우회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섰다. 10월 민족 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켜 광문회를 설립해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한 20여 종의 고전이 간행되었다. 1912년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이, 새별 등의 잡지을 발간하였다.1914년 종합 계몽 잡지 청춘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민중 계몽을 위해 공헌했다. 1918년 청춘에 역사 연구 논문인 계고차존(稽古箚存)을 발표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8개월형을 받아 복역한 뒤 1921년 10월 18일에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후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창립했다. 9월 주간지 동명을 창간해 1923년 6월까지 발행했다.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 활동에 참여했고, 동아일보에 사설을 쓰는 한편, 1926년 옛 백제 영토 방문기 심춘술례를, 근대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를 출간했다. 단군론(1926년), 불함문화론(1928년)을 발표하였다.1928년 10월 총독부 내에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창립했을 때 편수위원직을 맡았다. 1930년 8월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교수와 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국과 간도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청구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