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63주기 육탄10용사 및 제62주기 다부동 전투 구국용사 추모식 봉행위원장을 맡은 삼중 큰스님 | | [더타임스 이종납 편집장] 6.25를 앞두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1사단 출신의 육탄10용사와 다부동 전투 구국용사를 기리는 추모식이 열렸다.
지난 6월 18일 열린 63주기 육탄10용사 및 제62주기 다부동 전투 구국용사 추모식에는 봉행위원회(봉행위원장 박삼중 큰스님)가 주관하고 고문인 백선엽(예비역 육군대장) 전 육군참모총장과 추진위원장인 한민구(예비역 육군대장) 전 합참의장이 참석했다
육탄 10용사는 1950년 6.25전쟁 발발 이전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대치된 상황이었던 49년 5월 4일 북한군에게 불법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포탄을 안은 채 적진지에 뛰어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산화한 10명의 군인을 말한다.
49년 4월 남천점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은 인민군 1사단 제3연대 병력 1천 여 명을 개성 송악산 후방에 집결시켰다가 5월 3일 새벽 송악산 능선을 따라 기습 남침, 38선 남방 일대의 고지를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우리 국군은 빼앗긴 송악산 고지의 재탈환을 수 십 차례 시도했으나 수적 열세와 적의 토치카(지하 참호)에서 쏘아대는 기관총 공격에 시간이 지날수록 아군의 피해만 늘어갔다. 결국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송악산 능선에 버티고 있는 북한군의 토치카 10개소를 파괴하는 것만이 38선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적진에 폭탄을 안고 뛰어들 용사를 모집했다. 적진에 폭탄을 안고 뛰어든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목숨과 직접 맞바꿔야 하는 작전이었으므로, 공격대원을 지정할 수가 없는 문제였기에 지원자를 받기로 한 것이다.
당시 서부덕 이등상사를 공격대장으로 하는 9명의 군인들이 용감하게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박격포탄과 폭약을 안고 스스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하늘을 뒤덮는 폭음과 함께 적의 토치카는 박살났고, 한국군은 송악산의 주요 고지를 무사히 탈환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낮 12시경 중화기 소대 분대장 박창근 하사가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해 단신으로 수류탄 7개를 몸에 지니고 돌진하다가, 적의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했다.
정부는 아홉 명의 용사에 박 하사를 포함한 열 명의 용사를 "육탄 10용사"로 명명하고 이들의 조국애와 희생정신을 기려, 서부덕 상사는 소위로, 다른 9명은 상사로 특진시키는 동시에 을지무공 훈장을 추서하고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또한 다부동 전투구국용사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당하고 한 달 만에 전국토의 92%가 적에게 유린당해 6.25전쟁의 최후의 보루로서 절체절명의 극한상황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의 공격을 방어하다 전사한 장병들이다.
한편 이번 육탄10용사 63주기 추모식은 예전과 달리 육탄10용사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봉행하기 위한 봉행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봉행위원회 고문에는 한국 역사상 첫 4성 장군이 된 백선엽 장군, 추진위원장에는 제40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한민구 예비역 육군대장이 맡았고 박삼중 큰 스님이 봉행위원장을 맡아 처음으로 육탄10용사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봉행했다.
이날 봉행위원장을 맡은 삼중 큰스님은 장렬히 산화한 육탄10용사의 이름을 거명하며 “육탄10용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는 ‘우리를 결코 잊지말라’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삼중 큰스님은 특히 “57년 전 꿈많은 한 소년이었던 저는 그때 이 육탄10용사의 비문을 읽고 이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했고 이분들을 위해 제대로 된 의식을 한번 해 드려야 되겠다”고 다짐했고 “오늘 비로소 그 꿈을 이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삼중 큰스님은 이번 추모제를 위한 봉행위원회에 백선엽 장군과 한민구 장군이 흔쾌히 동참해 주셔서 더없이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또 위령제를 집전해 주신 법륭스님(기원정사)을 비롯 성문스님(선광사) 정림스님(영평사) 현도스님(자비사) 현오스님(선운정사) 혜공스님(구월암) 미경스님(대금암)과 장진용 사무국장, 허점순 원장(보덕사) 권대자 창건주(가원정사)님께도 일일이 감사함을 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