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수(黃學秀)는 1898년(광무 2)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위로 임관된 뒤, 친위대 및 시위대 소대장을 거쳐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교관, 안동진위대장,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 교관을 역임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가 지방유지들과 협력,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 의원, 군무부 비서국장 등을 지냈다. 임시정부가 분열되자 무장독립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간도로 건너가 1925년 북간도의 독립군정부인 신민부(新民府)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에는 김좌진(金佐鎭)의 뒤를 이어 참모부위원장 겸 군사위원장이 되어 활약했다. 1928년 3부통합회의에 신민부 대표로 참석했으나, 3부가 통합되지 못하고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양분되자 혁신의회의 중앙집행위원·군사위원장에 취임했다. 1930년 2월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홍진(洪震)을 중심으로 이청천(李靑天)·신숙(申肅)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그 산하의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이 되어 항일전투를 지휘했다. 만주사변 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간부들과 함께 중국 관내로 들어가 임시정부와의 통합을 모색했다. 1938년 임시정부의 군사위원, 다음해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41년 한국광복군사령부가 서안에 설치되자 광복군특별당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