묄렌도르프는 1882년 12월 27일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참의(參議)로 임명되어, 독일 태생의 서양인(西洋人)이 조선(朝鮮)의 고급 관리가 되었고 1883년 1월 12일 통리아문이 외부(外部)에 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확대되자 협판(協辦)으로 승직(昇職)해서 해관(海關)과 변관(邊關) 업무를 총괄하는 정권사(征權司)의 책임자가 되었다.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우두머리는 독판(督辦)이고 책임자로 5인의 협판(協辦)이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協辦)의 자격으로 어명에 의해 1883년 4월 24일 조선해관(朝鮮海關)을 창설하고 박동(薄洞)에 해관(海關) 본부를 정했다. 1883년 7월 25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督辦) 민영목(閔泳穆)은 일본 공사 다께조에(竹添進一朗)와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과 해관세칙(海關細則)을 조인(調印)했고, 11월 3일부터 실행된 것으로, 일반상품의 관세율이 8% 수준을 유지했다. 9월 19일부터는 인천, 부산, 원산 등지의 개항장에 감리(監理)를 두어 해관(海關) 업무를 감독하도록 했다.총세무사(總稅務司) 메릴(Merrill)은 1885년 10월 부임해서 12월 해관(海關) 본부를 정동으로 옮겼다. 1908년 1월 1일부터 해관(海關) 본부가 관세국(關稅局)으로 변하고, 총세무사(總稅務司)도 관세총장(關稅總長)으로 변했으며, 개항장의 해관(海關)도 세관(稅關)으로 바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