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생 신분이던 안창호(安昌浩)는 1905년 한인친목회를 발족시켜 한인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강탈당하자, 1907년 귀국하여 대한국인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 계몽 운동 외에도,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을 했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으며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했다.1908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고 1909년 청년학우회의 창설에 가담했다. 191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중앙 총회 조직에 참석하고 국민회 초대 총회장에 선임했다.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고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고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대리에 선출했다. 대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며 인재 육성과 실력 양성을 강조했다. 1924년 중국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북경에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작성하여 보냈다. 1928년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하여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대공주의를 제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