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광(柳子光)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출전했다. 세조에게 발탁되어 병조 정랑이 되고 146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탄핵하여 제거한 뒤,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1477년(성종 8)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되었고, 공신적(功臣籍)을 삭탈당한 뒤 동래에 유배되었다. 1481년 공신의 봉작을 회복하고, 정조사(正朝使)·등극사(登極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91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493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로 있으면서 성현(成俔) 등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완성했다.성종 대 이래 신진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집권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게 되자 훈구세력은 연조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의 제거를 꾀하게 되었다. 1498년(연조 4)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있던 이극돈(李克墩)으로부터 스승의 문인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음을 듣고, 이를 세조의 찬위(簒位)에 대한 비유로 간주하여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노사신(盧思愼)·한치형(韓致亨)·윤필상(尹弼商)·신수근(愼守勤) 등 사림파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던 훈구세력·외척을 모은 뒤, 김종직·김일손이 대역죄를 범했다고 연조에게 고했다. 이어 김일손 등의 심문과정에서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 전체로 사건을 확대하고, 이들에 대한 죄명과 형량 책정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무오사화를 계기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1506년 연조 재위기간 동안의 잇단 사화와 실정에 반감을 품은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류순정(柳順汀) 등이 연조를 쫓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할 때 성희안과의 인연으로 이에 참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에 봉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