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金相玉)은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해 계몽교육에 헌신했으며 경북 풍기에서 결성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참여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본격적으로 대한광복운동에 뛰어들어 윤익중(尹益重), 신화수(申華秀), 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반일 비밀결사 조직인 혁신단(革新團)을 결성한 뒤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1920년 김상옥(金相玉)은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韓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동순(金東淳)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임시정부 의연금·독립자금 등을 모금하여 상하이로 전달했다. 김상옥은 1922년 10월 무기와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안홍한(安弘翰), 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한성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대한광복운동 탄압의 본거지로 악명이 높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다나카 형사부장을 죽였으며,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열흘 후인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일본 경찰의
류자광(柳子光)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출전했다. 세조에게 발탁되어 병조 정랑이 되고 146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탄핵하여 제거한 뒤,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1477년(성종 8)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되었고, 공신적(功臣籍)을 삭탈당한 뒤 동래에 유배되었다. 1481년 공신의 봉작을 회복하고, 정조사(正朝使)·등극사(登極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91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493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로 있으면서 성현(成俔) 등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완성했다.성종 대 이래 신진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집권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게 되자 훈구세력은 연조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의 제거를 꾀하게 되었다. 1498년(연조 4)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있던 이극돈(李克墩)으로부터 스승의 문인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음을 듣고,
장영실(蔣英實)은 1423년(세종 5) 노비 신분을 벗고 상의원별좌(尙衣院別座)로 임명되었다. 1424년 중국의 체재를 참고하여 물시계를 만들어 그 공으로 행사직(行司直)이 되었다. 1432년 김돈(金墩)·이천(李) 등을 도와 간의대(簡儀臺)의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기기의 제작을 감독했다. 1433년 호군(護軍)에 올랐으며, 같은 해 6월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했다. 이듬해 김빈과 함께 자동시보(自動時報)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1세기 송(宋)의 소송(蘇頌)이 제작한 천문시계장치와 아라비아 시계의 자동시보장치에 영향을 받은 이 시계는 시(時)·경(更)·점(點)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북·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4년 7월 1일부터 사용된 표준시간은 자격루에 맞추어 운용되었다. 또한 같은 해 금속활자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갑인자(甲寅字) 제작을 감독했다. 1437년 천체관측용 기구인 대·소간의(大小簡儀),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여 주야 겸용 시계로 쓴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신숙주(申叔舟)는 1438년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지냈다. 1441년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열성이 왕에게까지 알려져 세종으로부터 어의를 받기도 했다. 1443년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명나라 한림학사로서 요동에 귀양와 있던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찾아 10여 차례 요동을 왕래하면서 음운에 관해 논의했으며, 명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도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하면서 운서(韻書)에 대해 질문하여 그 음을 정확하게 하는 등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음운을
류성원(柳誠源)은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1477년(세종 29)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當)에 들고,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호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한 뒤, 교서(敎書)를 만들어 그 훈공을 기록하려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했으나, 류성원만이 혼자 잡혀서 협박 끝에 정난공신의 공로를 기록하는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했다. 그 후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탄로되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 앞에서 칼로 자살했다. 이개(李塏)는 1436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41년 세종에 의해 집현전 학자가 되었다. 1450년에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 단종이 된 왕자의 개인 교사 역할을 하였다. 1455년에 단종이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자, 이개는 고위 관리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붙잡혀 처형당하였다.유응부(兪應孚)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48년에 첨지중추원사, 1449년에는
하위지(河緯地)는 143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로서 오례의주(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했다.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했고, 이듬해 춘추관사관으로 고려사 개찬에 참여했다. 1450년 사헌부장령이 되어 대신들의 비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대간의 직분을 다했다. 다음해 직집현전이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보좌, 진설(陣說)의 교정과 역대병요(歷代兵要)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병서 편찬에 참여했던 학사들의 품계를 올리려 하자, 종신(宗臣)이 함부로 사은(私恩)을 베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반대했다. 이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전보되자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갔다. 다음해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직하여 춘추관 편수관으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으로 단종에게 경사를 강론했다. 1455년(세조 1) 예조 참의로 재직중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조 참판으로 승진했다. 세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자 주제(周制)를 들어 서사제의 부활을 주장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은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으면서, 그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당부했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부제학을 거쳐 1454년 좌승지·형조참판을 지냈다. 145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신권의 지나친 강대화와 왕권 약화를 우려한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정분(鄭苯) 등을 축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1456년(세조 2) 다시 형조참판에 기용되었다.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집현전 출신의 관료가 요직에 많이 등용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 대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등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는 조치에 대해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즉각 반발했다. 세조의 전제권 강화와 독주에 불만을 품고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하려 했다. 당시 형조참판으로있던 박팽년은 성삼문·이개·하위지·류성원 등 대부분 전직·현직 집현전 유신들과 함께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456년 6
백제는 132년(개루왕 5년)에 성을 쌓았으며 고구려 장수왕은 이 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의 북한산주로 예속하였으며 신라 진흥왕은 북한산 비봉(碑峰)에 순수비(巡狩碑)를 건립했다.조선 선조 대의 임진왜란과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부터 피난의 적소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1659년(효종 10년) 왕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명령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축하게 하고 임란이어처(臨亂移御處)로 하여 도성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어 축성이 논의되었으나 성은 쌓지 못하였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이 이루어진 것은 1711년(숙종 37년)이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는 강력히 지지했고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사직(司直) 이우항(李宇恒)도 성의 터를 시찰하고 돌아와 찬성의 뜻으로 보고하자 1711년(숙종 37년) 음력 2월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음력 3월에 축성의 착수를 명하니 음력 4월 시작하여 음력 9월 축조 완료하였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의 둘레는 7,620보(步)이며, 문(門)은 14개, 장대(將臺)는 3개, 곽성(郭城)은 26개, 우물 99개가 있었다. 1401년 요동을 다녀온 이자영의 보고에 의거하여 명나라가
태묘제례(太廟祭禮)는 조선 국왕과 왕비,대한제국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태묘(太廟)에서 지내며, 태묘제례악(太廟祭禮樂)에 맞추어 진행된다.태묘에는 조선 태조에서 대한제국 순종 융희제에 이르기까지 19실(室)의 신위를, 별전(別殿)인 영녕전에는 16실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서편을 위로하여 제1실이 있고 제19실이 동편 끝에 있으며, 영녕전 중앙에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태조 위의 4대조 신위가 있다. 태묘제례(太廟祭禮)는 춘하추동 4계절과 12월 납일(臘日)에 봉행하였는데, 대한제국 융희(隆熙) 2년(1908)에 공포된 칙령 향사이정령(享祀釐正令)에 의하여 납향제(臘享祭)가 폐지되고 4계절의 첫달인 춘정월·하사월·추칠월·동시월 상순에 택일하여 봉행하고, 배향공신제(配享功臣祭)는 동향일(冬享日)에 한하여 행하였으며, 영녕전(永寧殿)은 춘추 두 번 태묘(太廟) 정전과 더불어 향사(享祀)하였다. 제향(祭享)은 국왕이 직접 행하는 친행(親行)과 대신으로 대행하게 하는 섭행(攝行)이 있으며 친행과 섭행은 제관의 명칭과 품계(品階) 또는 축문(祝文)이 다르다. 절차는 홀기(笏記)의 창홀(唱笏)에 따라 진행되고 제기(祭器)는 63기가 있으며, 제물(祭物)은 삼생
규장각(奎章閣)은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창덕궁 안에 설치되어 역대 국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를 관리하였으며 영조의 어필(御筆), 어제(御製)를 봉모당(奉謨堂)을 세워 봉안하고, 사무청사인 이문원(摛文院) 등을 내각으로 하였으며 출판 등을 담당하던 교서관(校書館)을 합쳐서 외각으로 삼았다. 1781년 정조(正祖)는 옛 도총부(都摠府) 자리로 옮기고, 강화도에 강도외각(江都外閣)을 신축하였고 내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국내 문서를 보관하는 서고(西庫)와 중국 문서를 보관하는 열고관을 만들었다. 열고관(閱古觀)의 도서가 늘어나자 다시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였으며 1781년에는 서호수(徐浩修)에 의해 규장총목이라는 도서목록이 작성되었다. 관원으로는 내각에 종1품∼종2품의 제학 2명, 종2품∼정3품 당상관의 직제학 2명, 정3품∼종6품의 직각 1명, 정7품∼정9품의 대교 1명이 있었고, 외각에는 당상관으로 겸하는 제조 2명 아래, 정3품 판교, 종5품 교리, 겸교리, 별좌, 정, 종6품 별제, 정7품 박사, 정8품 저작, 정9품 정자, 종9품 부정자 등이 있었다. 내각에는 정식 관원 외에 재주와 학문이 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