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화(李能和)는 1907년 3, 4월 일본의 여러 관서를 시찰하고 귀국하여 7월 국문연구소 연구위원이 되었다. 1908년 관립 한성법어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관립 외국어학교 학감이 되었으나, 1911년 총독부가 폐교령을 내려 학감직을 그만두었다. 1912년 사립보통학교를 세워 부인 정인호(鄭仁鎬)와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능인"이라는 교명을 붙이고 교장에 취임하여 3년간 재직했다. 1915년 각황사(覺皇寺)에서 불교진흥회를 발족시키고 간사로 활동하면서, 불교진흥회월보·불교계·조선불교총보 등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이능화는 처음에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교도였으나 이무렵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2년 총독부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자 그 위원이 되어 15년 동안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다. 민족문화운동에 몰두하여 저서의 대부분을 저술했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들과 총독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간부들의 한국학 연구모임인 청구학회(靑丘學會)의 평의원이 되어 1939년 청구학회가 해산될 때까지 관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