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여름 뜨겁던 한나라당 경선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시 mb 후보는 도곡동 땅 문제와 이후 bbk 의혹 등으로 도덕성에 심각한 의혹을 받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흑기사가 있었으니, 바로 감사원장으로 내정된 정동기 전 대통령실 민정수석비서관 출신이다. 그러나 감사원은 제4부로서 정치적으로 독립된 국가기관이다. 이러한 기관의 장에 친 이명박계 인물을 앉힌다함은 인사의 기본을 망각한 처사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이라 하여 그 고마움을 좋은 자리로써 보답하겠다는 뜻으로 국민은 이번 인사를 오해하기 쉽다. 어찌 국가의 세입·세출을 결산하고 국가 및 법률이 정한 단체의 회계검사와 행정기관 및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감찰을 하기 위하여 헌법에 의해 설치된 정부기관의 장 자리에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을 임명하려하는가? 이는 권력남용이요,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다. 그렇잖아도 지난 경선 및 대선 시 의혹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난 어느 시점에서는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감지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 장본인을 회전문 돌리듯 보은성 인사를 한다함은 오기요, 지나친 국민 무시라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한성(漢城) 5부(五部) 내의 포도(捕盜),순라(巡邏) 등 치안(治安) 업무에 중심 역할을 하였던 기관은 좌포도청(左捕盜廳) · 우포도청(右捕盜廳)이었다.우포도청(右捕盜廳)은 혜정교(惠政橋)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좌포도청(左捕盜廳)은 파자교(把子橋)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한성(漢城) 5부(五部)의 치안 업무를 담당하였다. 1894년 7월 14일 설치한 경무청(警務廳)의 책임자 경무사(警務使)는 내무대신의 지시를 받아서 한성(漢城) 5부(五部) 내의 경찰 업무와 감금 업무(監禁 業務)를 수행하되 범죄의 경중을 구분하여 법사(法司)로 이송(移送)하는 모든 일을 관장하였고 한성 5부(五部)에 경찰지서(警察支署)를 두었으나 1895년 경무지서를 경무서(警務署)로 하였다. 경무서의 서장은 경찰 사무를 관장하여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관할구역 내를 순시하며 민정 시찰과 부하의 사무 집행을 감독하고 부하직원에게 상부 명령과 경무 법규를 주지시키고 주무관(主務官) · 군(郡) · 읍(邑) · 동장(洞長) 및 기타 관계 관청과 문서 왕복을 할 수 있으며 서장이 유고시에는 수석 총순(首席 總巡)이 서장을 대리하였다. 총순(總巡)은 순검의 행의(行儀)와 복장을
신뢰와 화합을 바탕으로 한 박근혜표 복지평화 정책이 떴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20일 국회에서 ‘사회보장기본법 전부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한국에 맞는 복지국가의 비전을 제시했다. 박 전 대표는 유세장을 방불케 하는 많은 참석자들 앞에서 인사말을 통해 “바람직한 복지는 소외계층에게 단순히 돈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꿈을 이루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임을 주장했다. 아울러 “그것이 바로 개인의 행복이고 국가의 발전이자 최선의 복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근혜 식 복지는 일시적인 인기몰이 식 포퓰리즘이 절대 아니다. 그가 밝힌 복지는 항구적이며 행복한 복지를 말한다. 즉, 박 전대표가 제안하는 한국형 복지제도의 핵심은 “선제적·예방적이며 지속가능하고 국민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통합복지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한 국가의 정치는 가식과 거짓 없이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어야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정부와 국민 간의 원활한 소통은 물론 신뢰를 바탕으로 한 화합 위에 진정한 복지정책이 이루어질 때 그러한 나라는 부강하며 평화가 찾아온다. 군대도 안 갔다 온 면제자들이 주름잡는 거짓, 불신, 일부지역 편중 예산이나 인
1884년(고조 21) 역참제(驛站制)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통신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최초의 우편행정을 관장한 우정국(郵政局)을 설치하는데 1882년(고조 19) 12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내에 우정사(郵政司)가 설치됨으로써 근대적인 우편제도가 시작되고 초대 협판(協辦)에는 홍영식(洪英植)이 임명됐다. 1883년 홍영식이 보빙부사(報聘副使)로 미국을 시찰하고 미국의 우편제도를 고조 광무제에게 건의하여 1884년 3월 군국사무아문(軍國事務衙門) 안에 우정총국이 설치되었다.전의감(典醫監) 터에 우정총국 청사를 두고, 우정총관 홍영식(洪英植)이 법령을 준비하는 등 개국 준비를 하여 1884년 10월 1일부터 우편업무를 시작했다. 1887년 3월 6일 저녁 건청궁에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점화되었는데 향원정 연못에서 물을 얻어 석탄을 연료로 발전기를 돌렸고 16촉 광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발전기 설치·전등 가설은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의 윌리엄 멕케이가 맡았다. 1897년, 한성에 전화기가 설치되고 당시 전화는 덕률풍 또는 득률풍, 전어기 등으로 불렸으며 1902년 한성과 인천이 전화로 연결됐다. 1898년 1월,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부국 강병한 근대 국가의 건설을 위해 1893년, 국내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을 강화도(江華島)에 설립하였으며 영국 해군 대위 코렐과 하사관 허치슨이 강화도에 들어와 해군생도들의 근대적 군사훈련을 맡았다.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우리나라 신식 군대가 편제,계급,군복이 제대로 갖추어졌다. 1894년 10월 4일 칙령 제10호가 반포되면서 장교와 하사관, 병졸로 크게 나누고 장교는 대위 부위 참위의 위관급과 정령 부령 참령의 영관급,그리고 대장(大將) 부장(副將) 참장(參將)의 장관급으로 다시 구분하고 하사관은 참교 부교 정교의 3등급, 병졸은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의 3등급으로 나누었으며 그외에 무관생도가 있었다.대장(大將)은 총리대신(總理大臣)급과 같고, 부장(副將)은 대신(大臣)급, 참장(參將)은 차관(次官)급이었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는 1899년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원수와 대원수의 계급을 두었으며 원수는 황태자(皇太子), 대원수는 황제(皇帝)였다.원수부는 대한제국의 최고 군령기관이며 대원수인 고조 광무제가 군사적 실권을 갖고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대한제국의 황
조선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제후국(諸侯國)의 의례서이고 대한예전(大韓禮典)은 1897년 대한제국(Daehan Empire) 건국(建國)과 동시에 시행하기 위하여 사례소(史禮所)에서 편찬한 전례집(典例集)이며 황제즉위의(皇帝卽位儀) 등 독립국가에 필요한 전례를 새롭게 만들었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비해 규모가 크고 의장(儀仗)을 화려하게 표시하였다. 황제국(皇帝國)의 국격에 맞는 국가 의례를 정비하여 편찬한 의례서가 바로 대한예전(大韓禮典)으로 1897년 고조(高祖)가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 1대 광무제에 등극(登極)하며 대한제국 황실(皇室)의 국가의례를 황제의(皇帝儀)로 격상하여 거행하였다. 대례의궤(大禮儀軌)는 1897년 9월 칭제(稱帝)운동이 시작되어 10월 11일 대한제국(大韓帝國) 제천단(祭天壇) 환구단(圜丘壇)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10월 12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대한제국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하고 왕후와 왕태자가 황후(皇后)와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되고 10월 13일 대한제국이 건국(建國)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대한제국 건국 과정은 고조 광무
운현궁(雲峴宮)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생부인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의 저택으로 고조 광무제가 탄생하여 조선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다. 고조 광무제가 즉위하자 운현궁은 흥선헌의대원왕이 10여년간 섭정(攝政)하며 정치를 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섭정(攝政)을 행하던 1863년 ~ 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노락당(老樂堂)과 노안당(老安堂)은 1864년 9월, 이로당(二老堂)은 1870년 준공되었다.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노락당(老樂堂)은 초익공(初翼工) 7량(七樑) 건물로 사대부가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는 기법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 문양이 남아있다. 정면 3칸은 앞퇴를 개방했고, 좌협간 2칸 중에서 한 칸 부분이 개방되어 좌측 날개 부분의 통로 역할을 한다. 좌우 각 2칸은 온돌, 중앙 3칸은 대청이다. 좌우측의 날개 부분 즉 안채의 몸채에서 직각으로 꺾여 있는 부분은 돌출부가 각 2칸이며 부엌과 창고로 쓰였다. 고조 3년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가례가 있었던 곳이다. 흥선헌의대원왕이 국정을 의논하던 노안당은 전체적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은 공자의 위패(位牌)를 봉안·향사(享祀)하는 대성전(大聖殿),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도서관 존경각(尊敬閣),유생 교육 경비 조달하는 양현고(養賢庫),동무(東廡)·서무(西廡),기숙사 동재(東齋)·서재(西齋)로 구성되어 있고 성균관의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제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유생(儒生)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大科 初試)에 응시할 수 있
개시(開市)는 조선 후기 청나라, 일본을 상대로 열었던 대외 교역 시장으로 압록강 하류에서 열리는 중강 개시와 함경도의 회령 개시 및 경원 개시, 동래의 왜관 개시 등이 열렸으며 개시에서 이루어진 무역 거래를 개시무역(開市貿易)이라 하고 회령 개시, 경원 개시를 북관개시라고 하였다.1407년(태종 7) 경상도 병마절도사 강사덕(姜思德)의 건의에 따라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를 왜인의 출입과 교역품을 통제하였으며, 상경왜인에게는 한양에 동평관(東平館)을 설치하여 숙소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도항왜인이 급증함에 따라 1418년 염포(鹽浦)와 가배량(加背梁) 2곳을 더 늘려 4곳으로 하였다가 1419년 대마도 정벌로 일시 폐쇄하였다.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1423년 부산포와 내이포 2곳을 허락하였고, 1426년 염포를 추가함에 따라 삼포제도(三浦制度)를 확립, 제포 30호, 부산포 20호, 염포 10호의 왜관을 설치하여 항거(恒居)왜인을 거주하게 하면서 도항왜인의 접대와 교역을 허가하였다. 왜관은 왜인들의 행동의 제한, 국방상의 이유로 교역처를 한정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하였다.1544년 다른 곳의 왜관(倭館)은 모두 폐쇄하고 부산포(釜山浦)에만 단일 왜관
한성 운종가(雲從街)에는 규격이 통일된 시전(市廛)이 설립되어 90여 종의 물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였다. 비단·무명·명주·모시·종이·어물을 파는 육의전(六矣廛) 상인들은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판매권을 받는 대신 국가에 대하여 관수품(官需品)을 바쳐 납세에 대신할 의무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산업이 크게 일어나고 화폐가 보급되면서 난전(亂廛)이라 불리는 사상(私商)들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세기 말 이래로 한성에는 이현(梨峴)·칠패(七牌)·종루에 새로운 상가가 번창하여 시전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貢人)들의 상업활동이 눈에 띄었는데 관청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관청에 납부하였다.17세기 후반 세곡 운송을 통해서 교역로를 확보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이 한강을 중심으로 미곡과 어물의 수송과 판매를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지방에는 부보상(負褓商)이라는 행상단이 있어서 생활필수품을 향촌에 공급하였는데, 16세기 이래로 장시(場市)가 생겨나면서 장시를 순회하며 거래하였다. 장시는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일부 장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