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金正喜)는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실사구시설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했고 북한산비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김정희는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
이서구(李書九)는 1774년(영조 50)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을 거쳐 지평·초계문신에 선발되었고, 1786년 홍문관에 들어갔다. 모역사건과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죄로 한때 유배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어 대사성·대사간·이조판서·호조판서·대사헌·우의정을 지냈고, 1825년 판중추부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문장을 배웠는데, 4가시인(四家詩人)인 이덕무·류득공·박제가 등도 박지원을 따르며 배웠다. 이서구는 사가시인 가운데 유일한 적출이었고 벼슬도 순탄했다. 과거의 고문(古文)만을 추종하는 데서 벗어나 당대의 문장을 중시하며 그 속에서 고의(古意)를 찾았다. 문장은 간단하고 쉬운 것을 귀하게 여기고 복잡한 것은 천하게 여겼다. 고문은 요약하여 기술했으나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정조가 문제삼은 문체의 타락은 세도(世道)의 타락과 직결된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의(理義)와 사실(事實)을 통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는 혁신적이거나 현실적이기보다는 대개 관조하는 자세로 주위의 사물을 관찰하며 고요함을 얻으려 하였다.
홍대용(洪大容)은 1765년(영조 41년)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3개월여를 북경에 묵으면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담론하며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천문학·지리학·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 학습하고 독일 사람으로 청나라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을 하는 할레르슈타인과 흠천감 부감(副監) 고가이슬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觀象臺)를 여러 번 방문, 견학하여 천문지식을 습득해 오기도 했다. 홍대용의 북경 방문은 당시의 여러 북학파 학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실학의 도입에서 그 선구적 업적이 크다.귀국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한 유포문답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었다.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으며 토지 등을 균등하게 분할하는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특히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신분 제도 개혁을 위해 과거제를 없애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신분 등에 관계없이 8세 이상의
류득공(柳得恭)은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제천·양근 등의 군수를 지냈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의 직함을 가져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첨지중추부사에 승진한 뒤 만년에 풍천부사를 지냈다.시문에 뛰어났으며, 규장각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의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발해고(渤海考)에서 요동(遼東)과 간도를 한민족사의 무대로 파악했으며 고구려의 역사 전통을 강조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했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대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파악했다. 발해고는 군고(君考)·신고(臣考) 등 9고(考)로 되어 있으나 권(卷)도 나누지 않은 단권(單卷)의 간략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발해사를 최초로 체계화시키고 이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파악하였다.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민족이 세운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로서 한민족의 주체의식을 되새겨 보려는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박제가(朴齊家)는 1778년 이덕무와 함께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기균(紀畇)·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이정원(李鼎元)·포자경(鮑紫卿) 등 청을 대표하던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문물에 감명을 받아 여러 가지 선진기술과 도구를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앞으로의 학문적 기초를 세웠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北學議) 내편·외편을 썼다.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정조가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적 신분질서 내 서얼층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1777년 3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공포하고,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박제가는 이덕무·류득공·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더불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13년간 규장각의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간행하는 한편 국내외의 서적과 저명한 학자들을 접하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786년 정조가 왕명으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구폐책(救
이덕무(李德懋)는 박제가(朴齊家)·류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박지원(朴趾源)·박제가·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산천·도리(道理)·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류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에 능했던 이덕무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사근도찰방·광흥창주부·적성현감 등
박지원(朴趾源)은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이덕무·류득공·이서구·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다. 1780년 진하별사(進賀別使)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淸)의 베이징에 갔다. 5월 25일에 출발해 8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고, 10월 27일 한성에 돌아왔다. 이 연행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박지원은 양반사회를 비판하고 사회모순을 지적한 호질(虎叱)·허생전(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와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렸다. 1
유홍기(劉鴻基)는 오경석이 중국에서 구해온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읽고,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 이후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가던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되어 점차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1877년 박규수가 죽자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이동인(李東仁)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였다. 1882년 기구 축소와 감원을 통해 국가 재정을 절감하기 위해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구관당상(句管堂上)에 어윤중(魚允中)을 임명했다. 감생청(減省廳)은 약 6개월 동안 존속하다가 수구파의 반대로 폐지되었다.유홍기는 종 9품 부사용(副司勇)에 임명되었다가 정 9품 사용(司勇)으로 승진되었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동인(李東仁)은 1879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정세를 시찰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했다. 그해 6월초 일본 혼간사의 부산 별원(別院)에 와 있던 승려 오쿠무라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의 혼간사에 체류하며 일본어를 익히면서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변모된 일본사회를 살펴보고, 한성에 있는 김옥균·박영효에게 서구 문명을 소개한 서적 등을 보내면서 계속 연락을 취했다. 교토에서 10개월간 머무른 뒤 1880년 4월 도쿄로 가 혼간사 승려들의 알선으로 일본의 정치가들과 접촉했다. 그해 8월 수신사로 온 김홍집(金弘集)과 친교를 맺어 김홍집과 함께 9월말 귀국했다. 귀국 후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閔泳翊)의 집 사랑방에 거처하면서, 민영익의 주선으로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고조 광무제에게 상주(上奏)해 고조 광무제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고조 광무제는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쥰센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에 따라 미국과 조약을 맺기를 원했다. 1880년 10월 원산을 거쳐 일본에 도착한 뒤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을 만나 미국과의 조약 체결의 알선을 부탁했다. 일본 지도자들과 접촉한 뒤 12월 18일 부산을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있으면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부상당한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조 광무제의 어의(御醫) 겸 정치 고문이 됐다. 1885년 광혜원(廣惠院)에서 의사와 교수로 일하다가, 1887년 참찬관(參贊官)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의 고문으로 도미(渡美), 조선에 대한 청(淸)의 불법적인 간섭을 미(美) 국무성에 알리고,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내한하여 외교 활동을 시작하고 1892년 한국휘보를 창간했다.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1886년 소학교 교사로 초청을 받고 D.A.벙커 등과 함께 내한(來韓)하여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1905년 을사늑약 늑결 직후 한국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여, 고조 광무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1906년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 행위를 폭로하는 한편, 1907년 고조 광무제에게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