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로행정을 총괄하는 관아는 병조(兵曹)였고, 역전(驛傳: 郵驛) 사무를 관장하는 실무부서는 승여사(乘輿司)였다. 역로행정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전국에 퍼져 있는 530여 개의 역을 40-44개의 역도(驛道)로 조직하여 관할하게 하고, 역로의 중요도에 따라 대·중·소로 역의 등급을 나누었다.역도(驛道)의 책임관원으로 찰방(종6품) 1인을 두고 있었고, 역무(驛務)를 수행하는 종사자로서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역정(驛丁)·일수(日守)·역노비(驛奴婢)·보인(保人)·솔인(率人) 등이 소속되어 있다. 역장이나 역리들은 사신의 영송(迎送), 역마의 보급, 공문서 발송 등의 업무를 맡았고, 역노비는 급주(急走)노비와 전운(轉運)노비로 구분 편성되었는데, 공문서 전달, 사신 접대에 따른 운반, 역토지(驛土地) 경작에 종사했다. 출장 관원이 각 역(驛)에서 말을 지급받을 수 있는 증표로 마패(馬牌)가 발급됐다. 즉 연호(年號)·월(月)·일(日)과 상서원인(尙瑞院印)을 새긴 앞면과 그 뒷면에 마필 수가 말그림으로 새겨져 있는데, 말그림은 1-5필까지의 5종이 있다.마패(馬牌)의 발급 절차는 중앙에서는 출장 관원의 품계에 따라 병조가 문첩(文帖)을 발급하면 상서원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9년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원수와 대원수의 계급을 두었으며 원수는 황태자(皇太子), 대원수는 황제(皇帝)였다.원수부는 대한제국의 최고 군령기관으로 의정부,궁내부와 병렬적인 관계이며 대원수인 고조 광무제가 군사적 실권을 갖고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권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강화를 위해 1899년 6월 22일 반포된 원수부 관제는 대황제 폐하는 대원수 군기를 총괄하고 육군과 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한다. 이를 위하여 원수부를 설치한다고 규정했다. 대한제국 황제는 대원수로 군기(軍機)를 총람하고 육·해군을 통령(統領)하며 대한제국 육·해군의 통수권자로서 황제의 권한을 상징하는 옷이 바로 대원수 군복이다. 고조 32년(1895) 4월 우리나라에 서양식 군복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광무 3년(1899) 6월 22일의 조칙에 따라 고조 광무제는 서양식으로 만든 대원수 군복을 평상복으로 입었고 군복의 검은 색과 단추의 오얏꽃(자두꽃) 문양의 단추는 대한제국(大韓帝國) 군복의 복제이며 대한제국 시대의 황제 조칙(詔勅)을 통해 옷깃의 별 5개는 대원수(大元帥) 군복에 부착한다. 원수부의 편성은 군무국,검사국,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의 하나인 보신각(普信閣)에서 파루(罷漏:오전 4시에 33번)와 인정(人定:오후 10시에 28번)에 종을 울려 도성(都城)의 출입시간을 알려주었다. 보신각 동종(普信閣 銅鍾)은 1985년까지 보신각(普信閣)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으며 조선 세조 14년(1468) 주조(鑄造)한 보신각 동종은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중요문화재이므로 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여 전시홍보하여야 한다. 보신각 동종은 돈의문(敦義門) 안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에 있는 신덕왕후의 원찰(願刹) 흥천사(興天寺)에 있었으나,흥천사가 폐사(廢寺)되자 원각사(圓覺寺)로 옮겨졌다.국가의 안녕과 국왕의 평강(平康)을 비는 원찰(願刹)·국찰(國刹) 원각사는 1467(세조 13)년 4월 초파일 10층석탑의 완공과 함께 낙성되었고 1488년(성종 19)에 화재로 소실되어 원각사지10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국보 2호)과 원각사 창건의 내력을 적은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보물 3호)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종루에 보관했으며 고조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普信閣) 편액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 동종이라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조 광무제는 황제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어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는데, 한성의 방비와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호위대(扈衛隊)의 개편과 창설하였다. 황제가 육·해군을 친히 통솔하고, 국방·용병(用兵)·군사에 관한 각종 명령권과 군부 및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창설되었다. 또한 헌병대·포병·공병·치중병(輜重兵)·군악대에 대한 새로운 관제가 마련되었으며, 육군법률(陸軍法律)·육군법원(陸軍法院)·육군감옥(陸軍監獄) 등이 창설되었다. 지방군제 역시 전국의 지방군을 진위대(鎭衛隊)로 통합 개편하는 한편, 무관학교 관제(武官學校官制)를 새로이 반포하여 1898년 무관학교가 개교되었다.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가 반포되었고, 훈장제도(勳章制度)가 창설되었으며, 국가(國歌) 및 각종 기(旗) 등이 제정·발표되었다. 외국과의 통상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대한국민을 보호하였다. 농상공부에서 주관하던 홍삼(紅蔘)의 제조 및 광산사업과 탁지부 주관의 둔토(屯土)가
시위대(侍衛隊)는 1895년(고조 32) 칙령(勅令) 120호의 반포에 따라 편성된 군대로 군부대신의 감독 아래 궁내의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그 편제는 1개 연대(2개 대대) ·1개 대대(2개 중대) ·1개 중대(3개 소대)로 하였으며 연대에는 연대장(副領)을 비롯, 대대장(參領) 2명, 부관(副官:副尉) 2명, 향관(餉官:正尉) 2명, 중대장(正尉) 4명, 소대장(副尉:參尉) 14명이 있었다. 양번(兩番)으로 나누어 매 3일마다 교대하여 궁내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군악대도 부설하였으나 창설 3개월 후인 8월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중앙군(中央軍)을 러시아식으로 개편하면서 1897년(광무 1) 3월 시위대(侍衛隊)를 다시 설치하였다. 시위대는 총원 1,070명으로 200명을 1개 중대, 5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제하였는데, 대대본부에는 대대장 1명, 부관(부위) 1명, 향관(軍司) 1명, 정교(正校) 1명, 부교(副校) 1명을 두었으며, 중대에는 중대장 1명, 소대장 4명, 부교 ·참교 14명, 병졸 180명을 두었는데, 10월 1개
여당인 한나라당이 네티즌들로부터 어느덧 한날당으로 불리고 있다. 군병과 중에는 보온병(保溫兵)과가 있다느니, 보온병이 폭탄이거나 핵폭탄이라는 등 군 면제 행불 상수로 불리는 여당 대표의 군대 무기 무지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조롱은 군면제정권의 패러디물이 홍수를 이루면서 그 끝을 모르고 행해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내년도 예산 날치기는 서민 무시하는 불신정권에 이어 복지예산을 대폭 누락시키면서까지 굳이 ‘4대강 주역’ 水公 특혜 시행령을 몰래 개정하는 등 ‘몰래정권’이란 평가를 들어도 싸다. 아울러 날치기 전 포항 등 특정지역에 선심성 특혜 예산, 일명 형님예산이니 과메기예산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으니, 그들은 무슨 낯으로 국민을 대할까? 아울러 불교계를 화나게 한 거짓말 등 이 정권은 거짓정권, 몰래정권, 불신정권으로 사방에서 엄청난 비난을 듣고 있다. 가히 자폭 수준이다. 그것도 자업자득이니 하루빨리 못난 권력 사라졌으면 할 국민이 많을 것이다. 이처럼 순리를 거부하고 급하게 예산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급체한 꼴이다. 국민 세금을 어찌 그리 영유아 접종 주사비용마저 없애고 애들 밥그릇 잡아채가면서까지 후안무치한 바보짓을 노가다 십장 일 처리하듯 하는가
현 정권의 밀어붙이기 식 날치기 예산 배정이 꼭 치매환자 같다. 국회에서 격투기장을 방불케 한 막무가내 식 한나라당에 의한 내년도 예산의 날치기 통과는 원척무효로 함이 옳을 것이다. 세계인에게 창피할 정도로 매년 12월을 장식하는 삼국시대 정치만도 못한 예산안 처리가 너무나 짐승사회 같다. 토론과 대화에 의해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던 신라의 화백회의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횡포와 폭력을 무기로 국민 세금 가지고 과메기 지역 형님 예산 특혜라는 해괴망측한 예산안 날치기 통과는 정말 있을 수 없는 함량미달의 탐욕과 일그러진 지역주의가 빚은 한편의 블랙코미디에 불과하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3년간 형님예산이 1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예산 배정이다. 몇 년 간 배부르게 예산을 배정받은 형님은 오히려 간신들이 아부하면서 비린내 풀풀 나는 과메기 예산에 특혜를 주려해도 이를 거절했어야했다. 폭식하다가는 설사하거나 꼭 뒤탈이 있기 마련이다. 아니, 정권자체의 기반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 아울러 이 정권은 입으로만 친 서민정책이니 뭐니 떠들어도 뚜껑을 열고 보면 언제나 립 서비스에 불과했음이 결과물로써 드러난다. 이번에도 영유아예방접종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0월 상순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둥근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천제를 봉행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며 환구제(圜丘祭)는 10세기 고려 성종(成宗) 대에 제도화되고 조선 세조(世祖) 대에 폐지되었으며 1897년 고조(高祖)는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황단을 축조하고, 10월 12일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황단에 나아가 환구제를 봉행하고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광무 원년 백악과 목멱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제천단 황단(皇壇)을 축조하였으며 1층은 장광이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 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 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皇壇)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1910년 불법 무효한 경술늑약에 의한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 후 환구단의 건물과 터를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훙서(薨逝) 후에 묘호(廟號)가 올려진 조선의 추존(追尊) 왕은 모두 9명이다. 추존 왕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아버지, 그리고 태조의 4대 선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이다. 태묘(太廟)에 신위를 모셔서 왕위에 오른 왕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왕릉의 능제에 맞게 규모를 키우거나 석물을 추가하여 능도 더욱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삼촌의 왕위를 계승한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은 세조의 맏아들로 의경세자에 봉해졌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예종 역시 1년 남짓한 재위 기간을 채운 뒤 병사하였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잘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대비는 둘째 아들인 잘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고, 그가 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대한민국이 국격 낮고 위험한 장사치 나라로 급변한 것 같다. 아랍에미레이트로부터 원전을 수주하면서 군대를 덤으로 끼워 넣기 한 것도 뒤늦게 드러나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에 공병부대를 동원함은 물론 속도전으로 밀어재끼는 탓에 군인이 사고로 죽는 등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몰염치 정권은 그 끝을 모를 정도로 엉뚱한 곳에 저돌적이다. 이러한 정권은 양심세력이 하루빨리 퇴진시켜야 옳다. 아니 독불장군 식 막무가내 정치를 하는 세력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모든 국민이나 정치인이 나서 반드시 퇴출시켜야 이 나라 금수강산이 보전되고, 백성이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안보를 등한시 하는 정권은 여, 야나 우익, 좌익의 이념을 떠나 이미 공공의 적이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안보를 장신구로 여기는 정권은 나라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돈으로 바꾸려는 장사치에 불과하다. 입에 돈 잔뜩 물고 적군에 죽을 운명이다. 어찌하여 군 면제정권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보다도 경제적 이득, 그것도 재벌에 편중되는 온정하나 없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신봉하는가. 복지와 군 장비 예산은 삭감한 채 4대강에 올인하는 이상한 정권에 많은 사람들이 신물을 낸지 오래다. 중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