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은 1904년 3월 10일 러일전쟁이 터지자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왔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 보도하던 베델(배설:裵說)은 데일리 크로니클을 사직하고 1904년 7월 18일부터 한국인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영문판)를 발행하고, 1905년 국한문판을 발행하였으며 일본인 검열관의 사전 검열을 피하기 위해 베델의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던 대한매일신보에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이 모여들어 일본을 통렬히 비판했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1만부를 넘어 최대 신문사가 되었으며,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 1910년까지 6년 동안 일본에게 침략당하는 대한제국의 실상을 알리고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등 항일 사상을 고취하였고 고조 광무제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실어 일본의 침략 만행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도록 하였다.
박승환(朴昇煥)은 대한제국 육군 참령을 지냈으며,명성황후 살해사건, 을사늑약,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 등 일제의 만행에 대해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1907년 7월 정미늑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일제 통감부를 통해 장악하면서 이후 강제 병합의 최대 장애가 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킬 것을 순종 융희제에게 강요했다.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칙령이 내려졌으며, 8월 1일에는 군대 해산식이 강행되고 무기가 압수되었다. 이때 시위보병(侍衛步兵) 1연대 1대대장으로 있던 박승환은 병을 핑계로 해산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군대해산의 명을 듣고 분개하여 군인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애석함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는 내용의 유서를 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후 자결했다. 박승환의 자결이 알려지자 부대 장병들은 무기를 꺼내 들고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여 일본군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전투가 끝난 후에도 약 1개월에 걸친 지방 진위대(鎭衛隊)의 해산과정에서 원주 진위대와 강화 분견대(分遣隊) 등이 집단적으로 항쟁을 벌여 많은 군인이 정미독립운동으로 전환하여 무력(武力)이 강화되었다.
요즘 방송,언론...여당 야당할것없이 온통 박근혜 때리기에 아주 혈안에 골몰하고 있다.한나라당은 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비대위원장’에 추대해놓고, 정두언,남경필,전여옥,정몽준,이재오등등 인사들이 ‘재창당’하자고 난리를 치고 공멸에 빠져들고 있다.‘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왜? 추대했나?애초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맡고싶어서 맡은건가? 더구나 재창당운운하는 인사들은 현정부 실세들이다.한나라당 지지율이 곤두박질 친 지난 6월 지방선거에 나타났듯이 이대로 가다간 금뱃지 달기가 멀어지자 박 전 대표를 일제히 비대위원장으로 지목했고 지금 이순간 그들은 치마폭을 붙들고 있다누구보다도 더 정권재창출에 힘을 모아주어야할 책임있는 인사들이, 이제는 아주 대놓고 ,한나라당을 불싸질러 태워버리자고 난리를 치고 있다..도데체 이게 무슨짓인가?수많은 한나라당원들을 완전 개무시하는 행위가 아닌가?좌파정권 모진 십년세월동안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비록 푼돈이지만 당비를 꼬박꼬박내왔다. 이런 당원들을 ‘재창당파’인사들이...완전 개무시하고 있다.정몽준의원처럼 특별당비 10억을 내야만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곳이 한나라당인가? 그렇다면 ‘재창당’들은 부자나 재벌이 아니면 한
박동완(朴東完)은 1919년 2월 하순 박희도의 권유로 3·1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2월 27일에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3·1 대한광복운동에는 전도사로 일했던 정동제일교회의 목사 이필주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했으며 출소 후에는 신간회(新幹會)의 간사를 맡아 활동했고, 기독신보 주필, 신생명 주간으로 언론 사업에 주로 종사했다. 1925년 4월 신생명이 폐간되자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7년 1월 이상재, 안재홍과 함께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본부 상임 간사를 맡았다.1927년 12월 9일 중국 동삼성에서 거주하는 한국인이 중국 관헌으로부터 귀화를 강요받고 박해를 받자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28년 1월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간도 한국인의 상황을 살폈다.1928년 중반 하와이로 파견되어 오아후 섬에서 목사로 12년간 재직하면서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는 등 목회 활동을 하면서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가
대구중학생 자살사건 광주중학생자살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다.그것도 같은또래 학생들이 저지른 조폭수준의 협박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이라는 보도가 있었다.이같은 보도를 접할때마다...우리사회에서 이런 사회문제의 근원지가 어디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된다.아이들만 나무랄 일인가?사회적책임이 큰정치인이나 언론...또는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사회지도자들이 제역할을 했는가? 그분들이 제역할을 했다면...학생들이 이와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렀겠는가?그동안 사회적 책임이큰 정치인들 그분들은 과연 학생들의 모범적 행동을 해왔었는가?하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아이들의 거울이 바로 어른이다. 해서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 중요한 교육중 교육의 기본이다.본기자는 학교앞 교통봉사를 했다.불과 5^6세에서부터 열몇살 학생들까지...그들나름의 세계를 눈여겨본적이 봤다. 큰대형버스에서 하차하는 5^6세의 유치원생들에게는 신체적 어려움이 있어, 내리는걸 도와주었는데,대부분의 유치원생들은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잊지않았는데, 한 유치원생이 제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리다 말고 ‘누구세요’라는 말에 순간 당황했다.유치원관계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부모도 아니고 도데체 누군데,
나석주(羅錫疇)는 1913년 간도로 이주했으며 간도 뤄쯔거우의 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황해도 겸이포(兼二浦)에서 상업을 하며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다. 석방된 뒤 정미업을 하며 비밀항일결사를 조직,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내고 대한독립단원들과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파 숙청공작에 크게 활약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0년 9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경무국 경비원으로 일했다. 1923년 허난성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다.1925년 상하이로 돌아와 1926년 류자명(柳子明)의 소개로 톈진에서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했다. 1926년 6월 톈진에 체류중이던 유림대표 김창숙(金昌淑)과 모의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 들어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자 총격전을 벌인 끝에 다바타를 사살, 탄환이 떨어지자 자결했다.
남자현(南慈賢)은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간도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동삼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간도 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 되었다.편강렬, 양기탁, 손일민 등이 간도 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할 때 참가했으며, 무장 투쟁이나 테러 위주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참여했다. 1922년에 참의부의 채찬과 함께, 1926년에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목적으로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1928년 간도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석방 운동에 힘써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 1931년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였다.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냈다.1933년 주만 일본대사이며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의 암살 계획을 세우고 하얼빈에서 변장한 채 정탐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김하락(金河洛)은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리자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민승천(閔承天) 휘하의 도지휘(都指揮)가 되어 광주(廣州)·이천·안성·연천 등지에서 을미독립운동을 했다. 11월 17일 광주 노루목전투에서 일본군 100여 명을 죽이고 무기와 군량을 다수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광주·이천을 중심으로 의병들을 전투훈련시키는 한편,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1896년 2월 이현(梨縣)에서 적군과 교전했으나 패했다. 군사를 재수습하고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총병력 3기 9대를 인솔하는 의병장이 되었다. 5월 의흥군(義興郡)을 점령했고, 청송(靑松)과 비봉산(飛鳳山) 전투에서 토벌군을 격퇴했다. 6월에는 광주 인자점(仁疵店)에서 군비를 재정비하여 광주성을 공격·점령했다. 7월 청하(淸河)·청송의 의병과 영덕 의병장 신돌석(申乭石), 안동 의병장 류시연(柳時淵)과 함께 적과 싸우다 양쪽 어깨에 총탄을 맞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김지섭(金祉燮)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김시현(金始顯) 등과 조국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짐하고,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 간도·상하이·시베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22년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상하이·베이징에서 활동했다. 같은 해 11월 장건상(張建相)과 함께 러시아로부터 선전비를 받아 독립운동자금에 충당하고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으며 이어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했다. 그 뒤 국내에서의 파괴 공작과 테러 활동에 주력했다. 1923년 3월 폭탄 30여 개를 상하이에서 국내로 보내기 위하여 안둥현에 중개소를 설치하고 김시현·유석현(劉錫鉉)·황옥(黃鈺) 등으로 하여금 한성으로 반입케 하여, 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찰서와 매일신보 등을 파괴하려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실패했다. 1924년 초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일본의 총리대신과 총독을 비롯한 일본 고관들이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대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들을 저격하기 위하여 도쿄에 잠입했다. 그러나 의회가 무기 연기되는 바람에 계획을 변
[시사칼럼] 하남을 말하다.얼마남지 않은 총선을 바라보면서 하남시의 극변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하남의 큰 이슈는 ‘지하철유치’작업이다.지하철유치가 확정되기 까진 많은 사연들이 있었다. 그 중에 경기도의회에서 본격적으로 붐을 조성했던 윤완채 전,경기도의원의 행동이 첫 시작이라 하겠다.당시 윤완채 전,경기도의원은 김문수 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하남 전철 이슈화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하여 경기도의원 서명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어렵고 힘든 싸움이었다고 한다. 경기도 제정 상황을 감안하면 쉽게 통과될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남 출신의 경기도의원은 윤완채 의원뿐이었다는 점도 힘든 싸움이었다고 한다.그러나 윤완채 전, 경기도의원은 끝까지 파고들었고, 경기도의원 서명운동에서 첫 번째 서명자로 서명하고 하남시민 서명운동까지 함께 추진하여 오늘날의 결과를 가져온 장본인이다.하지만 하남시민과 한나라당 하남시당원협의회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하남 지하철 유치 사업은 없던 일이 아닐까 한다.하남시는 청정하남, 창조하남,청정하남으로 반복되는 정치적 마찰로 복잡한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곳이다. 하지만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 아름답지만 강한 도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