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순(朴齊純)은 1885년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급제, 중국 톈진에 종사관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 이조 참의와 참판, 한성부윤 등을 역임했다. 1898년 외부대신이 되고, 1905년 전권대신으로 을사늑약에 조인하였다. 같은 해, 한규설의 뒤를 이어 수상 격인 참정대신(叅政大臣)이 되었다.1909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었다. 내부대신으로서 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에 서명한 뒤,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에 임명되었다. 10만 원의 은사공채(恩賜公債)를 받았으며, 정4위에 서위되었다.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 후에도 경학원(經學院)의 대제학에 임명되어 계속해서 친일 활동을 했다.
고영희(高永喜)는 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하여 내부 참의, 학무아문 참의, 농상아문 협판을 지냈다.1895년 주일 특명전권공사를 거쳐 1896년 농상공부 협판, 외부 협판이 되었으며, 독립협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1899년 9월 12일 - 9월 17일,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1903년 주일 특명전권공사, 탁지부 협판(度支部 協辦)중추원 찬의(中樞院 贊議) 등을 거쳐 1904년 황해도관찰사, 1905년 제실회계심사국장(帝室會計審查局長)·경리원경(經理院卿)을 거쳤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 탁지부 대신으로 중용되어,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조 광무제의 양위를 강요할 때 반대하였다. 그 뒤 법부대신, 1909년 내부대신 임시서리·탁지부 대신(度支部 大臣)이 되었다. 정미늑약과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에 협조하여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포함되었다.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와 함께 10만엔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다.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에 임명되었다.
조중응(趙重應)은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살해 사건 직후 법부 형사국장으로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서둘러 폐비 조치하는 등 사후 처리에 가담하였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십여 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1906년 7월 귀국한 조중응은 이듬해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으로 단숨에 입각하였다. 정미늑약(丁未勒約)과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에 큰 공을 세웠다. 고조 광무제의 강제 퇴위에 관여했으며,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내각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0년 10월 16일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성균관을 폐지하고 경학원(經學院) 설립에 적극 참가하는 등 철저한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병무(李秉武)는 18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등 무관 벼슬을 지냈다. 1895년부터 약 1년간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한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1900년에는 일본으로 피신한 망명자와 연락한 혐의로 2년 동안 구금되고 유배형을 받기도 했다.다시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1904년 복관하여 이후로는 승진을 거듭했고, 1905년에는 고조 광무제의 사촌 동생인 이재완을 수행하여 일본에 가서 훈장을 받고 귀국했다. 이병무는 1907년 이완용, 송병준과 함께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조 광무제를 알현하고 퇴위를 강요하였다. 1907년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 군부대신으로 입각하여, 정미늑약 늑결로 군대 강제 해산을 주도했으며, 해산된 군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독립운동 탄압을 지휘했다. 1909년 군부가 폐지되고 친위부가 설치되자 초대 친위부 대신이 되었다. 1910년 시종무관장으로 경술늑약 늑결에 적극 협조하여 자작에 봉해졌다.
조민희(趙民熙)는 경술국적 중 한 사람이며 이완용의 처남이다. 1885년 경과증광별시(慶科增廣別試)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뒤 평안남도관찰사, 평안북도관찰사(1899년)와 주불공사(1901년), 주미공사, 주일공사(1904년)를 지냈다. 1907년 평리원 재판장(平理院 裁判長)에 임명되어 헤이그 특사 사건을 처리하기도 했다.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 당시에는 고조 광무제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승녕부 총관(承寧府 總管)을 맡고 있었다. 1910년 경술늑약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의 작위와 은사금(恩賜金)을 받았고, 1916년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에, 1921년 중추원 개편 때는 참의(參議)로 임명되었다.
한훈(韓焄)은 청양에서 일어난 홍주의진 의병대에 가담하여 독립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을사오적 암살 계획 등을 세우다가, 여의치 않자 직산군수를 사살하고 간도로 망명했다.1910년 경술늑약 늑결 이후 다른 사람들은 한국에서 간도로 망명했지만, 그는 간도에서 만난 채기중과 의기투합하여 귀국한 뒤 풍기군에서 광복단을 조직해 한국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다. 한훈은 간도를 오가며 무기를 마련한 뒤 한국의 부호들에게서 반강제적으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맡았다. 광복단 조직은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로 확대되었고, 한훈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1920년 미국 의회의 의원들과 그 가족들이 시찰단으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 대한 독립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 일본인 고관들을 암살하고자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했다가 김상옥의 집에서 김동순과 함께 체포되었다. 대한광복회 소속으로 부호 및 지방의 면장 등을 납치하거나 살해한 사실까지 드러나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장건상(張建相)은 1916년 상해(上海)의 신규식(申圭植)으로부터 함께 일할 것을 희망한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이후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교육을 지원하였고, 동제사를 확대 개편시킨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동제사의 회원으로서 1917년 간도 안동현(安東縣)에 파견되어 영국상선 안동지사장 죠지 쇼우와 친교를 맺으면서 국내로부터 오는 김두봉(金枓奉), 김원봉(金元鳳)의 길 안내역을 수행했다. 김원봉과는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쌓으면서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창설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19년 3월 3·1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을 위한 지원단체인 한인거류민단의 국민대회 준비위원에 선출, 김규식(金奎植), 여운형,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정 외무부(外務部) 외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임정의 외교활동을 수행했으며 여운형의 후임으로 임정 외무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를 부활시키고, 대한적십자사 상의원(
여준(呂準)은 북간도로 망명하여 1906년 이상설(李相卨)·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 등과 함께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교포 자녀들의 항일민족교육에 힘썼다.1907년 4월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는 특사 이준(李儁)을 안내해 이상설과 만나게 했다. 1912년 가을 퉁화현 합니하(哈泥河)에서 허혁(許赫)과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해 이주동포의 자활과 교육을 맡아보았다. 1913년 신흥학교(新興學校)의 교장으로서 교감 윤기섭(尹琦燮), 학감 이광조(李光祖) 등과 학교의 발전에 전력을 다했다. 정안립(鄭安立)·박찬익(朴贊翊)·정신(鄭信)·류동열(柳東悅)·신팔균(申八均)·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 39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남간도 교포들의 명의로 된 한국독립청원서를 중국정부를 거쳐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다. 1919년 3월에는 박찬익 등과 지린 군사독판부를 조직해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인가를 얻어 설립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부독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12월 임시정부 간서총판부를 설치하고 총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1년 5월에는
[더타임스 이종납 편집장] 박근혜를 지지하는 수많은 지지자들은 다음 대통령은 ‘박근혜’라는데 이견이 없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하늘이 점지해 놓은 상태라고 확신하고 있다. 대단한 신앙에 가까운 이야기다.그런데 안타깝게도 결론적으로 말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번 4.11 총선에서 최대 격전지가 될 수도권 출마를 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고대해 왔던 ‘대권’은 그야말로 ‘아리송해’다.지난 대선 이후 ‘나홀로’ 고공비행을 해 오며 대세론을 형성해 왔던 박근혜 위원장이 최근 몇몇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에 뒤지고 있고 안철수 서울대 교수와의 양자대결에서도 뒤진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다자구도에서는 박 위원장이 ‘안철수-문재인’에 다소 앞서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야권 지지층이 안철수-문재인으로 분산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안심할 처지가 못된다.필자는 1년 전 이 칼럼에서 박근혜 대항마로 문재인의 등장을 예고한바 있는데 문 이사장이 민주당과 시민사회 등 제세력이 망라한 범야권통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통합에 성공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또 야권취약지인 부산지역에 본인이 총선 출마를 선언한데 이어 거물급 주자들을 부산경남지역으로 끌어들여 총선승리에 대
이장녕(李章寧)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07년 일제가 군대를 강제 해산하여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황실의 친위대에 편입되었으나, 그는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어서 이상룡과 이회영 형제들, 김동삼, 이동녕 등이 뒤따라 망명했고, 이들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무장 독립 운동가들을 양성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설립된 서일의 군정부 참모장을 맡았고, 이 기관이 북로군정서로 확대 개편되었을 때도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북로군정서는 1920년 대한독립군 등 다른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는데, 이때 이장녕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 영내로 이동했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 운동가들이 다수 사망하고 서일이 자결하였다. 이장녕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독립 운동 단체 통합을 위해 지린에서 열린 전만통일회의주비회 주비회장을 맡아 신민부를 조직했다. 1930년 김좌진 암살 이후 홍진의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고 한국독립군도 조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