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강렬(片康烈)은 을사늑약 늑결 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영남 지역 의병장으로 당시 강원도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이강년의 부대에 입대했다. 굉장한 거구이며 힘이 장사였고 능력과 기백을 보여 이강년에 의해 발탁되었고, 한성부 진격을 위해 이강년과 허위, 신돌석의 의병 부대가 집결한 양주 전투에 참가했지만 일본군의 공격에 패퇴했다.1910년 평양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 재학 중 안명근을 중심으로 황해도 및 평안도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체포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고,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무렵에는 황해도 지역에 항일유격대를 건설하려 한 구월산주비대 사건으로 다시 1년여 기간 동안 복역했다. 간도로 피신하여 장춘(長春)의 일본 적십자병원을 습격하고 펑톈에서는 시가전을 감행하고 길림(吉林)의 일본기관을 습격하었다. 화이더현(懷德縣)의 우자쯔(五家子)에서 항일 무장 단체인 의성단(義成團)을 양기탁, 남정과 함께 조직해 단장을 맡았다. 250명의 회원을 보유한 의성단(義成團)은 훈련 기관까지 갖추고 주요 기관에 폭탄을 던지는 테러 행위와 함께 일본군과 직접 시가전을 벌이는 등의
김종서(金宗瑞)는 국토 확장에 뜻을 두고 있던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1433년 12월 함길도도관찰사, 1435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가 되어 7, 8년간 북쪽 변방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 비변책(備邊策)을 올리는 등 6진(六鎭:종성·회령·경원·경흥·온성·부령)을 개척하여 국토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1416~43년에 걸쳐 개척된 압록강 방면의 4군(四郡:여연·자성·무창·우예)과 함께 우리나라의 국토가 두만강·압록강까지 넓어졌다. 1440년 한성으로 돌아와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지내고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를 거쳐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다. 1449년 8월에 달달(達達: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지자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하였다. 1449년부터 개찬에 착수하여, 1451년에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의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로 고려사(高麗史)가 완성되었다. 같은 해 10월 우의정으로 승진, 편년체(編年體)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여, 1452년(단종
이종무(李從茂)는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1397년 옹진에서 만호(萬戶)의 벼슬에 재직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가 돌아와 상장군이 되었다. 1400년 2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1406년 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고,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세종 원년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복하였다. 1419년 음력 6월 19일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로 향하였다. 6월 20일 오시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두지포에 내려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적선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93호를 불태웠으며, 중국인이 포함된 포로를 구출하였다.이 공으로 이종무는 장천군(長川君)에 봉해졌다.끝없는 탄핵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으며 한성 밖에서 거주하게 된다.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
최윤덕(崔閏德)은 1419년(세종1년) 조선의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5월 14일에 조정에서 대마도의 정벌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해 음력 6월 19일 장천군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삼고, 영의정 유정현을 3도도통사로 하고, 참찬 최윤덕을 3군도절제사로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하였다.6월 20일에 선발대가 대마도에 상륙한 이후 본대가 뒤이어 상륙하여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수색하고 근거지를 소탕하자 왜구들이 산으로 달아나 방어하였다. 이에 26일에 왜구와 결전을 위해 전진하던 중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후퇴하였다. 최윤덕이 중요 길목을 차단하니 보름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항복을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항복을 받은 지 7일 만인 7월3일 거제도로 개선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러한 포용정책으로, 오랜기간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2년(세종14년) 12월 9일에 평양감사의 보고에 야인이 경계에 침입하여 사람과 물건들을 약탈해가니 강계절제사 박초가 추격하여 사
정철(鄭澈)은 1561년(명종 16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1567년(명종 32년)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를 하였다.1568년(선조 1년) 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다. 1578년 장악원정으로 기용되고, 사간·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였다.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된 후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작품을 썼다. 관동별곡은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하고 또한 고사(故事)·풍속까지 삽입한 것이며, 훈민가(訓民歌) 16수는 백성을 교화(敎化)할 때 포고문이나 유시문을 대신하여 시조(時調)의 형식을 빌려 지은 것이다. 1583년(선조 16) 예조 참판이 되고, 이어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논척(論斥)으로 다음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가사 생활에 들어갔다.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1589년(선조 22년) 우
류성룡(柳成龍)은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156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대비가 죽었을 때 류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 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았다.1590년 예조 판서,이조 판서,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하여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1591년 선조가 명
이항복(李恒福)은 1580년(선조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다. 과거 급제 이듬해에는 한림학사가 되고 1583년에는 이이의 추천으로 친구인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했다. 또 홍문관인 옥당의 벼슬아치로 천거받았다.호조참의가 되어 전곡(錢穀)의 출납에 밝았으므로 판서 윤두수(尹斗壽)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이후 1589년 예조정랑으로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붕당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슬기와 인내로써 항상 조심하였으며, 재치와 익살이 뛰어났다. 건저(建儲) 사건이 일어나 정철의 죄안을 처리하는 데 태만하였다고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가는 도중 이조참판에 올랐다. 두 왕자들을 모시고 평양으로 가서 형조판서에 특진하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 명나라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영변과 정주를 거쳐 의주에 이르렀다. 이덕형(李德馨)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맡으며 명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동시에 왕실 근위대 정비에 전력을 다하고 올바른 정치로 선조를 보필하였다.
이덕형(李德馨)은 158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한 뒤 옥당인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修撰)과 교리(校理),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90년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1년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조선시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1592년 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좌의정으로 있던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과 화의 교섭을 했으나 결렬되었다.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임진왜란 중 접반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우찬성을 지냈으며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한성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598년 4월 38세의 젊은 나이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 1602년 3월 영의정이 되었다. 1601
하륜(河崙)은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되었는데 명나라와의 표전시비(表箋是非)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언사가 있다고 하여 문서 작성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나라측의 강경한 요구에 하륜은 정도전을 보낼 것을 주장했으며 1396년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되고 이방원(李芳遠)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그 공으로 정종이 즉위한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그해 대대적인 관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태종의 즉위 직전에는 정승 반열에 올라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1400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서 관제개편을 주도하고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우정승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관제를 개혁했으며,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게 했다. 1402년(태
복합쇼핑몰 경방 타임스퀘어(대표 김담)는 5일 제일모직의 글로벌 패스트패션(SPA) 브랜드인 ‘에잇세컨즈’ 4호점을 서울 서남권 최대 규모인 약1,200㎡(360평)규모로 오픈했다. 이번 오픈을 맞아 5일부터 특별 할인, 사은품 증정, 경품 추첨 등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