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관수(白寬洙)는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소식을 접한 일본경찰이 기독교청년회관을 난입, 독립선언 저지와 이를 가로막는 학생들과의 격투가 벌어졌고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백관수의 낭독은 계속 되었고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 사회자 윤창석의 기도로 폐회하였다. 현장에서 일경에 연행된 백관수는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고 2·8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1925년 5월 김준연(金俊淵)·안재홍(安在鴻)·백남훈(白南薰) 등과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만들어 민족운동의 조직을 육성하려 했다. 연정회와 태평양문제연구회를 단일화하는 등 민족진영 단체를 통합하려 하였다. 1927년 2월 좌·우 이념을 초월한 민족단일단체으로 신간회가 출범할 때, 백관수는 조선일보사 대표로 참가했다. 1927년 여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 기독교 청년회 주최 2차 태평양 회의에 이상재가 운영하던 조선일보 편집인으로 조선일보 대표자격으로 참석하였다.1928년 조선일보 사설 ‘보석(保釋)지연의 희생’이 문제가 되어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 주필 안재홍과
김성수(金性洙)는 1915년 4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 초 그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을 준비했다.3.1 대한광복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송진우가
조도선(曺道先)은 1895년 러시아로 건너가 이르쿠츠크 등지에 머무르면서 세탁업, 러시아어 통역 등에 종사하다가 190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하얼빈(哈爾濱)으로 갔다.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대장대신(大藏大臣)과 회견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기회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것을 결심하고, 안중근(安重根)이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에게 조력을 요청하자 쾌히 승락했다. 조도선은 우덕순(禹德淳)·유동하(劉東夏)와 함께 채가구역(蔡家溝驛)에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면 거사하기로 하고,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거사하기로 약속한 후 대기하고 있었다.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여 미수로 그쳤으며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했고 체포되어 뤼순(旅順)에 있는 관동도독부감옥서에 이송되었다고 1910년 2월 14일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우덕순(禹德淳)은 1905년 겨울 연해주로 건너가 북간도관리사(北間島管理使)를 지낸 이범윤(李範允)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의병을 조직, 항일전을 준비하였다.1908년 여름 의병대 참모총장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과 회령 지방 등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왜병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09년 봄 다시 러시아로 건너가 연추(煙秋)에서 안중근·김기열(金基烈)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함께 결사보국을 맹세하였다. 담배 행상 등을 하며 자금을 모았고, 연해주를 돌아다니며 동지들 간의 연락을 취하였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듣고 함께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고 유동하·조도선도 동행하여 간도 하얼빈으로 가서 이토 히로부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안중근, 유동하, 조도선 등과 같이 하얼빈 일대를 각자 영역을 정해서 담당구역에 나타나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담당구역은 하얼빈 역, 우덕순의 담당구역은 채가구(蔡家溝)역이었으므로 각자의 구역에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10
송시열(宋時烈)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 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김자점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빌미로 조선의 북벌 움직임을 청에 밀고하여 효종이 청에게 추궁을 당하자 영의정 이경석 등과 함께 다시 물러났다. 그뒤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1658년(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1차 예송(
윤휴(尹鑴)는 1660년(현종 1)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송시열 등 서인이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여 시행하자, 삼년상을 지내자는 참최설(斬衰說)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국에서 참최설은 남인의 서인 공격에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는데, 기년복제는 왕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대부의 예(禮)를 왕에게 잘못 적용하여 왕의 지위를 낮추고, 왕의 법통을 둘로 나누어버리는 논리이므로 어떤 경우든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675년(숙종 1)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일어난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한 뒤,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자,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을 이끌며 활동했다. 이해 승정원 동부승지·이조 참의·대사헌·성균관 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 판서에까지 승진했다. 이후 대사헌·좌참찬·우참찬·형조 판서·우찬성 등을 번갈아 역임했다.재직중 지패법(紙牌法)·호포법(戶布法)·상평법(常平法) 등 부세제도 개혁안을 여러 번 제기했으나 지패법을 변형한 호패법(戶牌法)만이 시행했다. 도체찰부(都體察府
남구만(南九萬)은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정언·이조 정랑·집의·응교·사인·승지·대사간·이조 참의·대사성 등을 거쳐서 1668년 안변부사·전라도 관찰사를, 1674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숙종 초 대사성·형조 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같은 해 남인인 윤휴·허견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병조 판서가 되어 무창(茂昌)과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84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영의정이 되었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를 가볍게 처벌하자고 주장했으나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賜死)하기로 결정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 갔다. 그뒤 유배·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등용되었으나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강릉의 신석서원(申
[더타임스 지만호 칼럼니스트]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간의 서울관악을 단일후보자 경선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꼼수는 진보당 대표 이정희 측의 계획된 조작으로 백일하에 밝혀졌다. 그럼에도 사퇴 거부로 맞서고 있는 이정희 진보당 대표의 뻔뻔한 태도를 보고 야당을 사랑하는 일반국민과 시민단체의 희망2013 승리2012원탁회의 원로회원들(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김상근 목사,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정연주 전 한국방송공사 사장, 김은희 살림 정치여성행동 운영위원, 백승헌 희망과 대안 운영위원장, 황인성 시민주권 공동대표, 박석운 진보연대 공동대표) 마저 경선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다.일개 공당의 대표라면 국민 보기가 부끄러워서 석고대죄를 하여야 함에도 끝까지 버티고 있는 작은 체구가 보여주는 위선의 배짱은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짐작이 간다. 필자가 너무 관대한 생각으로 글을 쓰는 것 같다는 우파지지자의 여론에 몰매를 맞을지 모르겠으나 진정으로 이정희대표가 본인의 뜻과 다르다면 이차에 암흑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를 제언해 본다. 즉! 민족해방이며 민중민주를 부르짖는 종북, 친북 단체의 조종에서 탈출하라는 의미이다. 아마
안용복(安龍福)은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3월 박어출과 함께 일본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인슈(因州)로 끌려갔으며 호키슈(百耆州) 번주(藩主)가 막부(幕府)에 보고하자 막부는 설득하여 돌려보내라고 명령했고 6월 30일 안용복은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안용복은 호키슈 태수와 담판을 벌여서 막부로부터 울릉도, 자산도가 조선령 이라는 서계를 받아냈는데, 나가사키에서 대마도(對馬島) 영주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했다.대마도주는 안용복 일행 편에 울릉도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으며 조선 조정은 대마도로 보낸 답변에서 울릉도와 죽도를 서로 다른 섬으로 표현했다. 조선 조정은 호키슈에서는 안용복을 잘 대해줬지만 대마도에서 책망한 점을 알아내고 대마도 영주의 행동이 막부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대마도 측 사절에게 막부에게 대마도 영주의 행동을 밝히는 서계를 보내겠다고 말해 사절을 승복시켰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화답문을 고쳐서 울릉도와 죽도가 서로 같은 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일본인들이 조선 영토에 들어와 안용복 일행을 데려간 것은 실책이라고 했다.1695년 3월에 대마도 번주 소요시쓰구가 죽고 그 아우인 소요시미치가 대마
채응언(蔡應彦)은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초기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이진룡 의병부대의 휘하 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평안남도 · 강원도 · 황해도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에 황해도 안평의 순사주재소와 수안 헌병분견소를 공격하고 함경남도 마전도 순사 주재소를 급습하여 무기를 노획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1910년 경술늑약 늑결 이후에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하여 김진묵 의병장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3 - 4백명의 의병부대를 직접 이끌고 경기도 · 강원도 · 황해도 · 평안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근거로 효과적인 유격전술을 구사하였다. 1913년에는 황해도 대동리와 선암의 헌병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군 헌병을 처단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평남 성천 산악지대를 근거로 치열한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20명 이상의 일본 군경과 일제에 동조하는 세력을 처단하였고 의병부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매진하였다. 이에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하여 적괴 채응언수색대를 조직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