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에 대한 경례 등은 군사 파시즘과 일제 잔재”라던 유시민 金成昱 통합진보당 從北성향이 폭로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경기동부연합으로 통칭되는 진보당 내 당권파와 대립하는 유시민·심상정·노회찬·강기갑 등이 더 낫다고 보기도 어렵다. 경기동부연합 獨食(독식)에 대한 불평, 派閥(파벌) 간 다툼일 뿐 당권파의 從北성향을 문제 삼는 것도 아닌 탓이다. 진보당 내 당권파건 非당권파건 오십 보 백 보다. 정치권 퇴출 대상은 진보당 자체지 당권파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다. 非당권파 유시민 등은 주한미군철수-한미동맹해체-6·15와 10·4선언 이행을 골자로 한 통합진보당의 反국가·反헌법 강령을 그대로 추종해 온 이들이다. 비대위원장 강기갑은 경기동부연합의 상급단체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대의원 출신이다. 전국연합은 소위 ‘군자산의 약속’에서 “북한의 사회주의혁명역량에 가세·결집하는 연방제 통일”을 결의한 범주사파 연합체다. 강기갑은 진보당 내 당권파가 아닐 뿐이지 당권파와 다른 이념을 가진 인물은 아니다. 심상정 대표는 2007년 대선 때도 “평화체제가 지향하는 통일국가는 1국가·2체제·2정부인 한반도평화경제연합으로 설정해야한다”며 1국가·2체제·
광복제67주년, 버림받고 잃어버린 애국이 되어서는 안돼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선조 독립운동 자료찾아 36년 고군분투 광복 67주년인데 … 독립운동가 후손 정용선선생의 증손자 36년째 고투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경성형무소 원자리 공덕동 서부법원자리)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36년째 외롭고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미발굴독립유공자의 후손인 증손자가 있다.나는 ‘광복 67주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만사를 제쳐놓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 나는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비록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증조부님이 자랑스러운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마음 뿌듯하게 생각한다. “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오는 12월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다. 각 정당마다 자당의 대권 적격자를 뽑기 위해 후보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고 있다.집권당인 새 누리당에서는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끈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비롯해서 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역임한 임태희 실장과 이명박 대통령 킹메이커 역할을 했던 이재오의원 및 김문수, 정몽준, 안상수씨 등 여섯 명의 후보들이 고지 탈환을 위해 쉴 사이 없이 달리고 있다. 앞으로 선거일 까지 남은 기간은 반년가까이 되지만 벌써부터 각자의 후보들은 숨겨 논 비장들을 하나하나 씩 드러내 보이고 있다. 예컨데 자기 살기 위한 이기적인 발상으로 거침없이 내 볕는 발언이 새 누리당을 아끼는 많은 국민들에겐 점점 불안한 감정이 생기고 있음이다. 대선후보로 나선 출마자에겐 나름대로 절치부심으로 대권을 한번 잡아 보겠다는 의욕이 앞서 있겠지만 좀 성급한 발언들이 서서히 쏫아져 나오니까 하는 말이다. 앞일을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정국에서 대선 예비 후보들의 입으로 부터 쏫아져 나오는 발언이 도를 지나칠 정도이면 후보자도 공멸하고 새누리당 지지당원들도 공멸하게 되는 것이다.우리가 흔히 보는 스포
(재)군산사회복지장학회(이사장 김기봉)가 지난 5월 9일 노인회 어르신 300명을 초청하여 순천 송광사와 낙안읍성으로 효도관광을 다녀왔다.(재)군산사회복지장학회에서는 매년 효도관광을 실시해 오고 있으며 올해도 대형버스 7대와 효도관광에 소요되는 경비 일체를 지원했다.지역 인재양성과 복지사회 조성을 위하여 1994년도에 설립된 (재)군산사회복지장학회는 지금까지 소외계층이 필요로 하는 곳을 방문해 꾸준히 봉사활동을 펼쳐 오고 있으며,이번 행사 외에도 장학사업, 경로위안잔치, 소년소녀가정세대 후원, 시설후원, 게이트볼대회, 윷놀이·장기·바둑대회 등을 개최하여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어른들의 따끔한 훈계나 조언은 청소년들에게는 보약귀에 이로운 소리는 거슬리지만, 해롭게 하는 소리는 달콤하다.가정의 달 5월이면 각종행사가 많고 분주하고 마음이 들뜨고 기와 희망이 있는 달이다. 그러나 청소년에 대한 관심을 반짝 관심으로 벚꽃 개회 이후 꽃잎이 떨어지는 듯하다. 이제는 예전의 청소년이 아닌 듯싶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나 어른이 훈계하기가 무서운 세상이다. 세상살이가 제아무리 바빠도 돈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은 지양되어야 하며, 자녀와의 진정한 소통과 대화는 매우 유익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에게 훈계를 했다가 봉변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집단폭행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가 하면, 참견으로 생각하고 보복을 하는 경향도 있어 훈계하기가 어렵고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 지하철에서 노약자를 위한 경노석에 젊은이들이 독차지하고 있거나 어른을 보고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태연하게 바라보고 당당하게 앉아있는 현실은 보이도 안타깝고 계면쩍다.새롭게 신종 유행어가 된 막말녀, 된장녀, 막장녀, 등등은 잘못되어 가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맞벌이 부부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는 7인 동맹을 맺고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거사를 계획하였다.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일본의 전 총리이자 1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의 코콥체프와 회담을 하기 위해 하얼빈역에 도착했다.이토 히로부미가 9시 15분 하얼빈 역에 도착해 차내에서 20분 정도 코콥체프와 얘기를 나눈 후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총 3발을 쏴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켰고 다시 총 3발을 쏴 일본 관리들을 쏘았다. 수행원인 무로다(室田義文), 나카무라(中村是公) 등은 깜짝 놀라 이토를 보호했고 안중근은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뒤 러시아 군대에게 잡혔다. 이토는 당했다라고 한마디하고, 확실히 3발 맞았다. 상대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수행원은 우선 이토를 차내로 옮기고 이토가 좋아하는 브랜디를 한잔 따라 건네주었다.이토가 지팡이를 꼭 잡고 있어서 무로다가 지팡이를 빼내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범인이 한국인으로 이미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리자 바보 같은 놈
김문기(金文起)는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30년 예문관 검열(禮文館 檢閱), 1436년 사간원 좌헌납(司諫院 左獻納)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고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1450년 병조 참의(兵曹 參議)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형조 참판(刑曹 參判)에 제수(除授)되었다가 다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나갔다. 김문기는 1455년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工曹判書 兼 三軍都鎭撫)에 임명되었으며 1456년 단종(端宗) 복위(復位)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단종(端宗) 복위(復位)에 가담한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死六臣)이라 했으며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류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 사육신(死六臣)은 복관(復官)되었고 김문기는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려졌고 백촌유사(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한명회(韓明澮)는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의기투합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했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때 심복 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에 임명되고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받았다.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1454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부승지로 승진했으며, 그해 가을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저지시켰으며, 사육신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었다.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지고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다.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유교명(遺敎命)을 받들어
독도(獨島)는 하나의 섬이 아닌 2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동도의 면적은 7만3297㎡이고, 서도의 면적은 8만8639㎡로 서도의 면적이 조금 더 넓다. 독도(獨島)는 우산도(于山島), 자산도(子山島), 삼봉도(三峰島), 요도(蓼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지만 우리의 고유한 영토이다. 신라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異斯夫)가 울릉도와 우산도, 죽서도(竹嶼島), 관음도를 아우르는 우산국(于山國)을 편입한 이래로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독도를 우산도ㆍ요도ㆍ삼봉도 등으로 불렀으며 성종1(1470)년에 함경도 영흥(永興)에 사는 김자주(金自周)가 섬을 관찰해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삼봉도(三峰島)라 불렀다. 조선 태종 대에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워 두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취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의 어부들이 울릉도(鬱陵島)에서 불법적으로 고기를 잡아갔다. 안용복은 40여 명을 이끌고 울릉도에 들어가서 일본 어부들을 몰아내고 일본까지 나아가서 일본으로부터 다시는 울릉도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과 독도와 울릉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서류까지 받아 왔다. 독도를 자산도(子山島)
방정환(方定煥)은 1919년 3월 1일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등사판으로 찍은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1919년 말, 일본 도쿄의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을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동안 외국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1921년 한성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동화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잡지를 선전하였던 것이다.어린이는 이원수, 마해송 선생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