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패션 브랜드 루이까또즈(대표 전용준, www.louisquatorze.com)는 본격적인 봄 시즌 4월을 맞아 온라인 직영몰에서 다채로운 이벤트를 진행한다고 6일 밝혔다.루이까또즈는 이달 30일까지 온라인 직영몰에서 20만원 이상의 핸드백 또는 가방을 구매하는 모든 고객에게 이너파우치를 증정하는 ‘백 캠페인(Bag Campaign)’을 진행한다. 루이까또즈 이너파우치는 다양한 아이템을 소지한 여성들에게 유용한 가방정리 필수품으로, 로고가 찍힌 안감에 천연 소가죽 라인으로 마감 처리해 고급스럽다. 루이까또즈는 또 특별 사은선물로 이어캡 3종 세트를 증정한다. 오는 13일부터 30일까지 10만원 이상 구매 고객에게 제공하는 이어캡은 휴대폰의 이어폰 홀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유용한 아이템이다. 나만의 톡톡 튀는 개성을 연출하는 패션 액세서리로도 손색이 없다.또한 루이까또즈는 매월 14일을 ‘까또즈 데이(Quatorze Day)’로 지정, 이를 기념하는 ‘까또즈 캠페인’을 진행한다. 4월에는 신상품 이름을 맞추면 루이까또즈 보너스 포인트를 지급한다. 참여 횟수에 제한이 없으며 정답이 누적될수록 보너스 포인트를 계속 받을 수 있다. 이 밖에 온라인
일상생활 중 허리가 아파서 불편함이 있다면 척추질환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허리에 통증이 나타난다고 해서 단순히 디스크라 자가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유는 디스크와 비슷한 질환인 척추관협착증 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봄이 찾아오면서 척추관협착증 환자가 늘고 있다.국민건강보험공단의 조사 결과, 2010년 척추관협착증 환자는 85만 여명으로, 4년 전에 비해 무려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또 비수술척추관절치료전문병원 세연통증클리닉이 3월 중 방문한 허리 통증 환자를 조사한 결과38%가 척추관 협착증으로 내 원 한 것으로 나타났다.봄 계절부터 늘어나는 척추관협착증은 허리 통증은 있지만, 디스크 탈출이 되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또 척추관이 좁아지는 현상으로 선천적으로 나타날 수 도 있지만 대부분 잘못된 자세와 척추 뼈의 퇴행과정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점차 나이가 들면 척추관의 공간이 좁아지는데, 이 사이를 지나는 신경이 압박을 받게 돼 통증이 나타나는 것이다.주요 증상으로는 허리는 물론 다리고 저리고 터질 듯 느껴지고, 오래 서있거나 걸을 경우 무리가 가 쉬다가 걷고 하는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허리를 펴게 되면 아프고 구부리면 척추관이
배극렴(裵克廉)은 1376년 진주도원수로서 진주에 침략한 왜적을 반성현(班城縣)에서 물리쳤고, 이듬해 경상도도순문사로서 왜구를 물리치면서 합포에 성을 쌓았으며, 1378년에는 경상도원수가 되어 왜구를 대파했다. 이듬해 왜적의 기병 700명과 보병 2,000여 명이 진주에 침략했는데, 양백연(梁伯淵)·우인렬(禹仁烈)·한방언(韓邦彦)과 더불어 크게 이겼다. 울주·사주·청도 등에서 왜적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고 1380년 밀직부사가 되었다. 1388년 최영이 요동정벌을 강행할 때 우군도통수 이성계 예하에 배속되어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였다. 구 세력 제거에 참여한 뒤, 이듬해 판개성부사를 거쳐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1390년에는 평리(評理)가 되어 회군공신으로 추록되었고, 양광도찰리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월 이성계가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자 중군총제사로 임명되었다. 1392년 7월 문하우시중으로서 조준·정도전과 함께 공민왕 비인 정비(定妃)에게 왕은 정사에 어둡고 덕이 없어 임금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고, 그의 교(敎)를 받드는 형식으로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했다.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 일등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이 되었다.
조준(趙浚)은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중용되어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1390년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1392년 7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문하우시중을 거쳐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었으며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세자 책봉·요동 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어 이방원(李芳遠)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400년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 좌정승·영의정부사가 되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 되었다.조준의 정치이념은 인정(仁政)과 법치였다. 궁극적인 목표를 유교의 왕도와 인정에 두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경계를 바르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문제를 강조했다. 주례(周禮)의 육전에 의하여 중앙 정치제도의 완비와 재상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주장했다. 재상의 역할은 군자를 천거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군주는 적합한 재상을 얻어 함께 의논할 뿐이라고 했다. 주자학적 통치질
정도전(鄭道傳)은 1388년 음력 6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토지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밀직부사에 올라 조준과 함께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바로잡아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와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하여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1392년 4월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였고 정도전은 7월 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정도전은 어명을 받아 새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을 지어 발표하였다. 조선 건국 1등 공신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과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정도전은 천도를 결정하고 도읍 이전을 단행하였는데 경복궁과 태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坊)의 이름을 제정하였다. 노비 해방
황희(黃喜)는 1390년 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이 되었고 이후 직예문춘추관·사헌감찰·우습유(右拾遺)를 지냈다. 1399년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1400년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을 역임했다. 1401년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 경력(都評議使司 經歷)이 되었고 승추부도사(承樞府都事)·대호군·지신사·대사헌·병조 판서·예조 판서를 거쳐 1415년 이조 판서가 되었다.1422년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환급받고,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1423년 강원도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찰사로 파견되어 선정을 폈다. 1427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1430년 태석균(太石鈞)의 치죄(治罪)에 관여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했다. 1431년부터 1449년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다. 성품이 강직·청렴하며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국왕들의 신임을 받았지만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국왕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으며 오랜 관직생활 동안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바로 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현실적으로 불합리하거나 중복·누락된 부분이 있던 경제육전(經濟六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19대 총선에서 피 말리는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당초 민주통합당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됐지만 총선후보자들의 공천과정을 놓고 새누리당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어느 쪽이 승리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팽팽한 접전을 유지하고 있다.특히 양당이 총선에서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은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불과 8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새누리당은 민주당과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초 접전 지역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세종시에 대한 선거 결과다. 지금 세종특별시 국회의원 선거는 충청권 선거 판도의 중심지역으로 떠오르면서 전 국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지역이다.그러다 보니 후보들도 양당에서 거물급으로 공천했다. 충청권 정당임을 자임하는 자유선진당에서는 심대평대표가 직접 나섰고 민주통합당에서는 이해찬 전 총리를 내세워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새누리당에서는 신진 충남대 교수를 공천했다.자유선진당 후보인 심대평 대표는 고향사람으로서 세종시의 유치를 위해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투쟁해 왔다며 적임자 론을 내 세우고 있고 민주통합당 후보인 이해찬 전 총리는 세
이순신(李舜臣)은 1591년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으며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1592년 음력 4월 13일 일본군 15만 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고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렸다.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다.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언론에서는 안철수 서울대교수가 마치 대한민국 절대구세주라도 되는것처럼 마구 호들갑을 떨고 있다.과연 그러한가? 대한민국과 전국민들을 진정 책임질수 있는 사람인가?그렇다면 구체적인 증거를 한번 말해보시라...어렵고, 복잡한 국정현안에 대해...골머리를 싸매고, 몇날며칠 고뇌를 한적이 있는가?아니면 전국을 다니면서 비라람 황사먼지 맞아가면서...국민들을 상대로 진정성 있는 유세를 한번 한적이 있는가?참 대한민국 언론들 ...정말 어이가 없다.그저 언론 입맛에 맞으면...국정경험이 있던...없던... 국민상대로 언론권력을 이용해 선동질하고 있으니... 이들이 진정 대한민국을 걱정하고 국민들을 생각하는 언론들인가?자동차 운전도...최소한 면허증을 획득해야하고... 그리고 주행교육도 받아도..‘초보운전’이란 스티커를 부착하고 다닌다.그저 부모 잘만나서..돈있고, 거기다가 머리가 좋아...서울대교수에다...MB정부 무슨위원장직까지 꿰찼다고...대한민국 정치지도자가 될수 있다고 호들갑 떠는 언론들을 보면 정말 머리가 아프다.운전면허도 획득하지 않는 사람에게....대한민국 국가를 맡기겠다고 나선 언론들... 대한민국 현실을 정말 모르는건가? 아니면 모른척하는건가? 정말 해
정약용(丁若鏞)은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집필하였고 규장각(奎章閣)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예문관 검열,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4년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고 1799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병조 참지(參知), 좌부승지를 지냈다.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인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유배(流配)되었고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에서의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저술 대부분의 집필이 이루어졌다.